MEcosystem/꿈꾸는 맘

달과 6펜스

Musicpin 2020. 8. 17. 18:42

 

 

 

처음 제목만 들었을 때는 뭐랄까. 제목 자체부터가 굉장히 생소한 느낌이었다. 제목이 왜 ‘달과 6펜스’지? 궁금증이 들었다가  309p. 작품해설을 보고 궁금증이 풀리며 책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높아졌다.

 

310p. <달>과 <6펜스>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세계를 가리키는데 둘 다 둥글고 은빛으로 빛나지만 둘의 성질은 전혀 다르다. 달이 영혼과 관능의 세계, 또는 본원적 감성의 삶에 대한 지향을 암시한다면,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계, 그리고 천박한 세속적 가치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사람을 문명과 인습에 묶어두는 견고한 타성적 욕망을 암시한다. <달과 6펜스>는 한 중년의 사내가 달빛 세계의 마력에 끌려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빗대어 보자면 현실적 가치와 이상향(꿈)에 대한 삶의 가치를 논할 수 있을 책이겠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가슴에 일으켜진 소용돌이를 쉬 잠재우지 못하고 여러 가지 생각에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이래서 명작이겠구나 싶다.

 

책의 맨 뒷표지에 이런 설명이 나온다.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과 인간 문명에 깊은 염증을 느낀 젊은 세대에게 영환의 세계와 순수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킨 작품. 가까운 현실 문제를 떠나 모든 이에게 내재된 보편적인 욕망, 즉 억압된 현실을 벗어나 본마음이 요구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강렬한 소설.> 본마음이 요구하는 자유로운 삶으로의 욕망. 그것은 내 안의 목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이는가를 생각하게 하기도 했다. 남들이 가고 있는 길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이라고 해서 무작정 따르는 삶의 패턴이 과연 옳은 것인가.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 가장 큰 세 가지는 이것이다.

 

첫째. 세속적으로는 어느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 내면의 목소리 또는 신비로운 열반(涅槃), 아니면 진리나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미련 없이 떠나는 용기.

둘째. 스트릭랜드가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

셋째. 세속의 삶과 인간에 대한 태도와 우주의 비밀이나 진리를 찾아 들어가게 된 태평양의 외딴 섬에서의 자유한 삶. 그리고 신비한 그림. (세속적 삶 vs. 자유한 삶)

 

스트릭랜드는 행복했을까. 죽음의 그늘도 두렵지 않아 하며 신이 주신 경지에 올라 그린 그림은 과연 어떠했을까. 자신의 내부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어떤 힘에 이끌려 빈곤이나 고통, 병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지 않은 행동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책을 읽어나가면서 굉장히 다양한 감정과 마주했다. 나는 과연 6펜스의 삶인가, 아니면 달의 삶인가. 철저히 달을 쫒는 스트릭랜드의 삶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 하나하나에도 몰입되었던 건 내 안의 그들과 닮은 어떤 것들이 있기 때문이겠지.

 

초반 부 자신의 가족을 냉정하게 버리며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스트릭랜드가 이기적으로 보였으나 한편으론 스트릭랜드처럼 사는 이기적인 행동이 점차 부러워졌다. 자유.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함이 부러웠다. 어느 것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이 원하는 것을 찾아다니는 열정에 나의 심장도 뜨거워졌다. 내 안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 아니면 내 안의 두드리는 목소리에 답하기 위해 외부적인 어떤 것도 제약이 되지 않는다는 것.

내 안의 목소리,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신비로운 열반의 경지, 신의 영역을 표현하는 열정에 외부적인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그 사람의 용기가 나를 자극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소명대로 산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가슴이 너무나도 뜨거워 따른 것일까? 내가 진정으로 찾던 그 무언가를 눈 앞에서 보게 된 황홀경은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블란치 스트로브. 그녀는 정말이지 건강하지 못했다. 하긴 세속적 삶을 사는 그 어떤 사람도 썩 이상적이지 않았지만 블란치는 특히 건강하지 못했다. 물론 스트릭랜드와의 관계를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할 수 있지만 동정심이 일지 않는다. 블란치 그녀를 포함해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패턴대로 삶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나쳐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더치 스트로브 역시 그만의 색깔대로 삶을 살 것이고, 스트릭랜드 아내 또한 그녀만의 색깔대로 살고 있음을 책 말미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해관계에 얽히는 것이 한편으론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기도 한 듯 했다. 왜 스트릭랜드가 한치의 미련도 없이 과감하게 떠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책임감도 관계의 얽힘도 없는 행동이 사이다를 마신듯 시원했다. 나에게도 배워야하는 행동인 것 같다. 스트릭랜드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꼈고 나 또한 그러한 삶을 동경하게 됐다.

타인은 타인이고 나는 나라는 것. 지금의 감정이 나의 전체를 대변해 주지 않는다. 관계에 있어서도 나는 나의 패턴대로 타인은 타인이 나고 자란 패턴대로 살 것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 교집합이 있다면 우리는 뭔가 친근한 감정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뿐. 타인과의 관계가 나 자신이 되지는 않는다. 그 점이 명료해져서 시원했다. 내 정신건강을 위해 사람들과의 인연에 깊게 흔들리지 말아야지.

 

영화 모아나로 인해 태평양 해변 어딘가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에서도 그와 비슷한 낙원 이미지가 등장한다. 과연 현재에 익숙해진 내가 편리해진 지금을 과감히 버리고 이상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폴리네시아 지역 어딘가에 원시적인 낙원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내 안에서의 깊은 울림은 계속해서 들리지만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또는 흐릿하고 모호해서 알 것 같기도 한데 도저히 모르겠는 목소리. 울림은 명료한데 보이지 않는 안개에 갇혀 있다면 울림을 마주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었을 것이다. 불안함은 걷어내고 불완전함을 걷어내면서 울림을 마주하기 위해 세속적인 그 어떠한 것도 발목을 잡지 못하는 그 경지.

마침내 자신의 울림을 찾아낸 스트릭랜드는 병에 걸려 아팠을지라도 그게 큰 문제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아 초조해지기는 했을지언정. 자신을 옥죄고 있는 외부적인 것들이 족쇄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죽음도 자신의 열정을 표현하고 그려내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다. 원하던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깨달은 모든 것을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평온해지고 자유해졌을 것이다. 부럽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하다. 신의 경지에 이른 그는 진정 평안해졌을 것 같다. 그 감정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닿지 못해 혼자 두근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