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정신으로
군인정신으로
점심시간이 막 넘어가는 1시 30분 즈음. 카톡이 왔다.
“저희 티모임할 때 항상 돌아가면서 점심을 사고 차를 마시는데요~ 내일 식사대신 티모임 간식을 조금 좋은거루 준비하려고 하는데~ 내일 준비하실래요?”
갑작스럽긴 했으나 매 주 있는 티모임이고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신다는 것은 알고 있어서 짐작은 갔다. 그런데 이제까지는 사고 마셨는데 나보고 뭘 준비하라고 하니 당황스럽긴 했다.
“알겠습니다. 한데 감이 안 잡혀서요. 어떤 간식이 좋을까요??”
“생각해볼게요. 마카롱? 같은거?”
“아, 그럼 점심 후 티타임 간식이면 될까요?”
“티모임 간식이 아니고 점심 후 다과로 준비해주세요, 과일도 조금. 한분 더 정해드릴까요?
임신하신 ㅇㅇㅇ분하고 같이 준비하실래요?“
그러니까 티모임 후 점심은 외부 분이 준비해주시는데 그 후에 있을 티타임 다과 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였다. 많이 안 해도 되고 한 사람 더 지목해 준다는데 괜찮다고 했다. 임신한 사람한테 어떻게 일을 시키나. 갑자기 하루 전에 일정을 소화하라는데 그 외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한들 나처럼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이고 일을 부탁하기에 그만큼 친해진 사람들이 있을까.
이런 제안들이 어떤 의미인지는 이제 대충 감이 온다. 과연 거절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엄연히는 중령 사모님이다. ‘못하겠어요.’ 라는 말이 주는 후폭풍은 이미 결혼 초반에 겪어봤다. 자신이 있던 없던, 관련된 상황이 되던 안 되던, 나에게 제안이 떨어졌다면 그것은 해내야만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인원수를 물으니 대략 12명. 마카롱과 다과를 예로 드셨으니 두 개는 필수로 들어가야 하고 ‘조금 좋은 것’이라는 예시를 주었으니 품격을 높이고 신경을 썼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터였다. 야외에서 갖는 식사자리 후에 티타임을 할 수 있는 다과에는 뭐가 좋을까 싶다가 도시락을 생각했다. 30대부터 중년에 이르는 연령대를 고려하여서 모든 사람들이 고루 맛보고 어느 하나에는 맛있다는 말을 듣게끔 하는 것도 생각해 두어야 하고 말이다. 막상 제안을 받았을 때는 당황했으나 행동까지 당황할 수는 없다. 일단 군인정신으로 실행해야 한다.
부랴부랴 컨셉을 잡고 이미지를 구상했다. 과일 종류도 감안하고 정갈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인터넷 검색도 하고 그러자니 재밌기도 했다. 나중에 아이들이 소풍갈 때 신랑 도시락을 쌀 때 도움이 될 터였다. 한바탕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마트에서 장을 본 뒤 집에 돌아오니 4시 20분쯤. 아이들이 하원할 시간이다. 나머지는 다음 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해야 할 터였다. 이왕 하는 거면 잘 했다는 말, 신경 썼다는 말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외부 사람들도 온다는데. 아이들 소풍 도시락도 단체주문에 체크하여 보내는 판국에 새벽같이 기상해서 도시락이라....... 과거에는 왜 내가? 라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겠지만 지금은 그에 비하면 양반이다. 부글부글 속 끓으면 나만 손해이고 혼자만 아프다는 것을 겪은 후. 받아들일 것은 빨리 받아들이는 게 나의 건강을 위해서 좋다. 속앓이 해봤자 다 소용없는 일. ‘이번이 처음 도시락을 싸보는 것이니 그럴거야.’ 라고 다독거리며 정성을 들였다. 이왕 할 거면 군인정신으로. 안 되면 되게 하라 말을 읊조리면서.
신랑이 괜히 내게 미안한 지 새벽같이 일어나 같이 했다. 포도와 대추를 씻어주고 재료를 거들어준다. 자신을 만나서 안 해도 될 일을 하는 것 같다면서 미안하단다. 그게 어찌 신랑 탓이랴. 이러한 분위기가 있다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을. 한 문화와 분위기, 내포되어 있는 흐름을 개인이 부딪치기에는 상처가 크다. 주어진 상황에 맞게 해 가도 호불호의 평가는 듣게 되고 못한다 손사래를 쳐도 자세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이라 말을 듣는다. 윗사람이 잘 해주고 편하게 해준다 해서 그것이 진짜 편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아랫사람으로서 예를 갖추고 높은 자리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 한다. 그것이 이제껏 내가 피부로 느낀 분위기다.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편해서 웃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쉽지 않다. 가만히 있어도 말이 들리고 움직여도 말이 들린다. 상처를 받았음에도 나이스하게 입꼬리는 올리고 있어야 나의 상태를 들키지 않는다. 들키면 그에 따라 말이 나오는 것은 끊이지 않을텐데.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그만큼 이제는 잔뼈가 굵어진 건지, 현실을 받아들인 건지, 나다움을 내려놓은 건지.
꼬박 몇 시간을 끙끙대면서 하다 보니 9시 50분까지 겨우 마쳤다. 10시에는 티모임 시작이다. 최대한 쏟지 않게 트렁크에 잘 싣고 조심조심 그러나 부랴부랴 부대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내 눈 앞에서는 잘했다고 칭찬해 준다. 각자가 속으로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일 잘 할 것 같아서 콕 집어서 제안했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와야 나도 덜 힘들다. 나에게는 처음 싸 본 과일 도시락이었다는 것, 만드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후회가 없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려고 한다. 나 혼자서도 잘 해냈다는 뿌듯함과 다독거려주는 것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