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처럼 걷는 법
나에게 걷기란, 새삼스러움이었다. 굳이 집에 다시 돌아올 거 왜 신발을 신고 나가야 할까 싶은, 혹은 목적 없이 이리저리 걷는 게 무슨 이득일까의 범주였다. 할일 없이 그냥 서성인다의 인식이 어쩌면 내가 가졌던 걷기에 대한 인식이다. 아마 최초로 운동의 필요성에 의해 걸었던 지점은 첫째 아이 임신하고 나서인 것 같다. 임신 6개월을 넘어서며 배가 슬슬 나오기 시작할 때, 8개월이 지나면서는 안전한? 출산을 위해 트랙을 걸었다. 순산을 위해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고 많이 걸을수록 좋다는 말이 나를 움직이게 한 것 같다. 어쩌면 출산의 공포와 아픔을 좀 완화해 보고자 스스로 움직였던 최초의 경험이지 싶다.
82p. 태초에는 발이 있었다. … 본질적으로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다. 우리는 혼자서, 자기 자신을 위해 걷는다. 자유는 걷기의 본질이다.
88p. 이제 우리는 루소가 왜 걸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걷는 데에는 인류 문명의 인위적 요소가 전혀 필요치 않다. 가축도, 사륜마차도, 길도 필요 없다. 산책자는 자유롭고,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다. 순수한 자기 사랑이다.
자유와 자기사랑이라……. 나를 끔찍이 ‘생각’하기는 하지만 숨쉬듯 나를 사랑한다고 ‘느낀’ 적이 있었던가. 자신을 보살피고 돌보고 건강을 관리한다는 측면에서의 자기 사랑은……. 생소하다.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혹은 “철학보다 몸에 더 많은 지혜가 있다” 등의 문구는 나에게 신선함이자 새삼스러움으로 다가온다. 몸이 익히는 것은 잊혀지지 않는 체험적 경험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뚜렷한 동기가 없으면 걸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내가 몸이 체험하며 체득한다는 문장에 공감이 되는 나이가 되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는 루소의 말에 같은 움직임이나 달라진 내면의 이미지가 겹친다. ‘아무 목적 없이 걷는 것’. ‘그냥 무조건 걷는 것’ 의 의미는 순간에 머무르고 채우고 비운다는 지혜를 가까이 하게 한다.
올 해 가장 커다란 일상의 리모델링은 단연 걷기다. 어느 날 문득, 가만히 앉아서 책을 들여다 보는 나에게 시작된 변화로 걷기 시작했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 혹은 건강에 좋다니까. 마코 모임에서 걷기의 이점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가만 보니 운이 좋게도 아파트 단지 후문을 벗어나면 바로 자전거 도로이자 산책로가 나온다. ‘마음 먹기’만 한다면 곧장 걸을 수 있을 터였다. 해서 그냥 훌쩍. 걸었다. 처음엔 15분, 20분. 그러다가 40분, 50분을 걸었다. 더해서 남편과 함께 걸을 때면 1시간이 훌쩍 넘게 걷기도 했다. 걸을수록 만족감이 높아지는 경이로운 경험을 몸소 체험하고 나서야 ‘이런 거였구나’체감한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족감과 무언의 감동감이다.
무조건 빨리 걷는 것이 아니다. 목적에 닿기만 하는 지점이 아니다. 걸을 때 쿵쾅대는 심장의 느낌, 내 발에 느껴지는 감각, 뻗고 접을 때의 신체 움직임, 앞 뒤로 휘젓거나 좌우로 뻗을 때 팔의 적당한 긴장감, 아무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담고 비우며 담고 비우는 단순한 반복. 희한하게 목적 없이 걷는 반복되는 움직임이 감정에는 충만감으로 밀려온다.
100p. 유대교 신학자 아브라함 헤셸은 유대교의 안식일을 “시간 속의 성전”이라고 표현했다. 걷기는 움직임 속의 성전이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느껴지는 평화가 우리에게 달라붙어 함께 움직인다. 휴대 가능한 평온함이다.
몸짓Motion이 감정Emotion을 만든다고 했던가. 움직임이 가져다 주는 충만감이자 안정감, 혹은 평온함이 어쩌면 저자가 표현했듯 움직임 속의 성전 아닐까 고개를 끄덕인다. 걸음을 걷는 날과 아닌 날의 차이는 머리가 아닌 몸이 느낀다. 심장이 알아챈다. 그리고는 걷기 안에 깃든 지혜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그래,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거지, 뭐. 하루가 모여 일년이 되고 삶이 되듯이 시작은 한 걸음씩 내딛는 걸 거야. 어떤 길을 걷더라도 나는 그냥 이렇게 묵묵히 걸어야겠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적당하게, 꾸준히, 한 걸음씩.’ 나의 속도에 발 맞춰 걷는 것. 내 인생의 속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