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다
나는 엄마다
옥녀봉 중턱 쯤 자리한 놀이터. 우리 가정 포함 총 세 집이서 나들이를 갔다. 책육아, 함께 아이들 놀리기, 육아 이야기(수다)까지 1석 3조였다. 그 날은 둘째 아들이 세 살 즈음. 30개월도 채 되지 않았을 때다. 옥녀봉 놀이터에 있던 미끄럼틀 위에서 5살 남자 아이는 우리 아들을 때렸다. 마치 스트리트 파이트 게임 한 장면처럼(실제 아이네 집엔 스트리트 파이트 게임기가 있어 자주 했다.). 왼손으로 때리고 오른손으로 주먹을 날렸으며 왼발로 차고 오른 발로 내리찍었다. 아들은 쫙 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 쪽을 가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고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얼음.
적막이 흘렀고 다섯 살 아이는 내가 지켜보고 있음에 당황했는지 도망치듯 미끄럼 타고 내려와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놀라서 백지가 되었다. 아무 생각도 행동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맞아서 놀랐을 아들을 얼른 품에 안았다. 품에 꼭 안고서 그 장소를 벗어났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아들도 아들이지만 내가 정말 많이 놀랐다. 내가 아는 다섯 살 중 저렇게 때리는 아이가 있었던가. 양 손과 양 발을 사용하여 때리는 아이가 있다니....... 왜? 무엇 때문에? 그저 형과 같이 놀고 싶었을 뿐인데? 타인을 때린다는 것에 대한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가정에서 가르치지 않나? 먼저 차지한 미끄럼틀이 자신의 영역이 되었기에 때린건가? 이유를 막론하고 때린다는 것은 타당한 건가?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 아이 주도 하에‘쟤랑 놀지마.’로 여론 형성이 되어 따돌림도 받았다. 더군다나. 내 아들이 미끄럼틀 계단에 가만히 줄만 서 있는데도 ‘쟤가 자꾸 밀었어요.’라는 상황까지.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써 보지만 그 날 만큼은 파노라마. 한 조각 사진처럼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 아들을 볼 때마다 내가 그 때 아무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한 것 같아 죄책감이 인다.
아이 엄마에게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사건이 벌어지는 순간 아이 엄마는 통화 중이었다. 설령 함께 봤다고 한들. 사과는 커녕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 아들만 따돌리며 놀 때 그 엄마는 나에게 ‘아이들 노는 문화에 끼어들지 말라’던 엄마다. 말해 무엇할까.
아들이 같이 놀고 싶다며 닫힌 문 앞에서 울부짖을 때, 나의 아들만 따돌림 당할 때, 도저히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내 아들이 상처 받고 있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가 아이들 노는 문화의 적정선인가? 내가 아들을 다독거린 후 따라오는 말은 “예민한 엄마, 호들갑스런 엄마, 아들보다 딸 키우기 적당한 엄마, 딸에 맞춰진 엄마”였다. 사과를 하는데도 돌아오는 말은 예민한 엄마에 아이가 따돌려지는 상황이라면. 내 아들에게만 유독 부정적이고 안 좋은 분위기가 흐른다면. 나는 선택해야 했다. 내 아들을 소외시켜가면서 아이들과 놀리고 엄마들과 관계 유지를 하느냐, 아니면 내 아들의 보호자로 아이를 지킬 것이냐.
당연히 나는 내 아들이 먼저다.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값 없는 수다보다 내 자식이 더 귀한 엄마. 내 아들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데 지켜만 보라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나를 생각한 조언일까. 그 엄마의 아이들을 위한 것일까. 자신의 아이에게 이기는 경험을 주기 위해 다른 동생을 때려도 된다는 것이 옳은 것일까. 억울하지만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을 때. 오히려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 취급 받을 때. 상대방 엄마 옆에 서서 나를 적대시할 때.‘남자아이들은 그렇게 서열싸움이 당연한 거다, 이해 해야 한다' 할 때. 과연 자신의 아이가 그렇게 맞았다면 점잖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국 관계가 껄끄럽게 되었지만 나는 아들을 위해 거리를 두는 선택을 했다. 같은 상황이 또 온대도 나는 똑같은 결정을 할 거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람을 가려 사귀라고 아들에게 이야기해 줄 거다. 함부로 하는 사람에게는 진심일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나와 아들만 바라보고 집중한 후, 안정감있게 잘 살고 있다. 혹여나 또 나 혼자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 온다 해도 난 내 아이를 지킬 거다. 나 혼자라 극성 맘이 되고, 이상한 엄마, 요란한 엄마, 과도한 엄마로 불릴지언정. 내 아이의 미소와 건강한 내면을 지켜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아이의 보호자로서 나는, 나의 아이를 잘 보살펴야 하는 의무가 있는 나는. 나는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