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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

2020. 8. 9. 07:46 | Posted by Musicpin

본문 中.

“쌤, 글쓰기를 하면 고통이 사라져요?” 그 말은 정면으로 날아와 가슴에 그대로 박혔다. 화두가 되었다.

글을 써도 고통스럽고 글을 안 써도 고통스럽다. 그러면 쓰는 게 낫다. 뭐라도 하다 보면 시간이 가니까. 슬프지만 일을 하고, 슬픈데도 밥을 먹고, 슬프니까 글을 쓴다. … 서툴더라도 자기 말로 고통을 써본다면 일상을 중단시키는 고통이 다스릴 만한 고통이 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우리 뭐든 써보자고 하면 저마다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다.

7p. 아름답거나 아릿하거나, 날카롭거나 뭉근하거나, 타인의 말은 나를 찌르고 흔든다. 사고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몸에 자리 잡고 나가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숙성되고 연결되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서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이 조금은 된 것 같다.

우리에게 삶을 담아낼 어휘는 항상 모자라고,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크다는 것.

나의 편견을 확인할 때마다 나의 소망은 구체화됐다. 모두를 설득하는 글보다 “한 개인에게만 특수하게 해당되는 몫”을 놓치지 않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본디 글쓰기에는 한 사람 인격의 최상의 측면이 발휘되는 속성이 있다. 그 글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잡아준다. 한 사람을 사연과 이야기의 존재로 바라보면 존경스럽다.

삶을 위무하고 지혜를 안겨주는 보석 같은 이야기들. 이야기 전달자

<다가오는 말들>은 겪은 일, 들은 말, 읽은 말들로 엮은 에세이 모음.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세상에서 내게 온 이야기를 다시 세상으로 돌려 보낸다.

 

 

일상을 살아가는 언어가 와서 부딪친다. <저자의 말>에서도 화두 되었듯이, 과연 “글쓰기를 하면 고통이 사라질까?” 삶을 담아낼 어휘는 항상 모자라고,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큰데 우리는 과연 글쓰기로 나의 삶,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나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글을 써가던 맛을 보던 사람이 더 이상 하지 못하고 미루기만 하게 되었을 때. 갈증이 심화되어 정신이 피폐해짐을 느낄 때. 글쓰기가 문득 문득 떠오른다.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던 나에게도 근심의 층위가 깊어간다. 나를 들여다보는 글쓰기에 목이 마르다. 인간은 최악의 상태에서 진정한 통찰과 만난다(19p.)는 니체의 말에 머무른다. 4월 노력한 헛된 것들이 결국엔 나에게 통찰로 내 몸 어딘가로 남겨졌을까. 이 모든 것들이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결국엔 그 분이 인도하는 길로 예정되어 나를 훈련시키려 고통을 동반하게 하는 것일까? 더 큰 그릇으로 훈련하기 위해 갈고 닦는다는 말은 희망고문이다. 지경을 넓혀가는 과정이 나에게는 숨 막히고 괴롭다. 조화로워야 하고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 나는 자신을 죽여야 한다. 내가 괜찮기 위해 타인에게 적당한 거리를 둬야 하는 외로움에 짓이긴다. 함께 지내기 위해 들어온 조직 안에 나는 숨죽여야 한다. 누구를 위한 삶인가.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던 저자가 이만큼 떠밀려오고 나서보니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말(61p.)에 나를 대입시켜본다. 저자의 말대로 자신이 비정상이 아님을 알고 자기 억압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64p.). 글쓰기를 통해 나를 발견해 가는 과정을 다시금 재생산해야겠다는 다짐이 인다. 외부 소용돌이를 나만의 언어로 순화해 자기만의 언어로 길어 올리는 시간을 다시금 조우해야겠다는 간절함이 인다.

 

당신의 삶에 밑줄을 긋다가 · 우리라는 느낌이 그리울 무렵

인간답게 사는 방법의 탐구로서의 배움(94p.). 사람답게 살기 위해 공부하지만 공부하면서 사람답게 살기는 퍽 어렵다(100p.)는 고백, 공부든 일이든 하나의 목적성에 갇힌 사람은 앞만 본다는 말에 볼이 빨개진다. 타인과 어울리고 싶었다가도 내가 놀 시간이 어디 있나 싶어 공부만 매달리려는 내가 만져진다. 삶은 소풍이라 여행하려고 왔다는데 내 삶은 어디가 여행인건가 싶은 지점이다. 다양한 책들을 간접경험으로 만나는 것에 시선이 간다. 타인의 삶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서 나의 삶을 주인공으로 산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경험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하고 가라앉은 타인들의 언어를 만나면서 우물 안의 개구리가 여기에 있다고 고백하고 만다. 나를 이해하는 글쓰기에만 눈독들이고 있었더니 누군가에게는 이해하는 과정이 생략될 수도 방법을 알고도 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듣는 자의 자세로 임하기를.

 

낯선 세계와 마주했을 때 · 주위를 조금 세심히 들여다보면

안다는 건 자기 무지를 아는 것(237p.),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 일 때, 자기 삶의 문제인지도 몰랐던 문제가 드러난 경험(238p.).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타인에게 상처가 되었을 때. 어쩌면 나만 아는 지식이 정답이 되었다 편견이 되었을 때. 진실을 마주하는 그 순간은 언제나 수치스럽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여 가는데 유독 잣대가 되어 구시대적인 발상을 내뿜게 될 때. 그것만큼 당혹스러운 것도 없다. 마음 둘 곳이 있고 의지할 곳이 있음에도 매 시간 만져지는 일상의 무게 때문에 나만 죽을 듯이 힘들어요 푸념하는 나를 만날 때. 나는 내가 낯설다. 조금만 세심히 들여다보면 각자가 살아가는 삶에서 각자의 과제를 해결해 가며 살고 있을 텐데 유독 나 혼자 힘들다 징징거린다. 나의 틀을 깨는 도끼로, 자기언어를 구사하기 위한 생존의 언어로, 본연의 나로 사는 방편으로 글쓰기는 ‘자기 돌봄’이 된다.

 

기타.

은유 작가처럼 들어주는 사람으로 발 벗고 나서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내 틀을 벗어나 교류할 때 살아있는 삶이 된다. 어우러지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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