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걷는 사람, 쓰는 사람, 하는 사람-*
Musicpin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쉿! 애들아, 저기 봐봐. 엘사에 나오는 땅의 정령 바위 거인들이 잠들어 있어. 우리가 이야기하는 소리에 바위 거인들이 잠에서 깰지도 몰라.”

한참을 조잘거리던 입과 행동이 사뭇 진지해지고 애들의 눈이 한껏 커진다. 엄마는 아이들의 동심과 대화했다는 자부심에 한껏 들뜬다. 하여 과하게 쉴새 없이 조잘조잘 ‘땅의 정령이 여기에 있네, 바위 거인들이 일어나면 어떨 것 같아? 와, 여기서 다들 잠을 자고 있나 봐, 날이 더워서 물 속에서 자고 있네, 코만 내어 놓고서 숨을 쉬는 것 좀 봐. 엄마가 한번 큰 목소리로 깨워 볼까.’ 했더랬다. 그러다 결국 남매가 한 마디 외친다. ‘엄마, 좀 조용히 해봐.’

후훗. 아이들이 놀란 것 좀 봐. 재밌어 했을라나. 진짜 정령들이 잠이 깰까봐 노심초사해서 그러나? 아이들이 보기엔 큰 바위들이 어떻게 보이려나 내심 으쓱했다. 헌데 이런, 남매의 반응이 상이하다.

둘째 아이. “엄마,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진짜로 바위 거인이 깨면 어떡해” (훗. 그럼 그렇지!!)
첫째 아이. “엄마,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그만 좀 해, 시끄러워.” (어머, 이럴수가!!)

세심히 살피는 모양새가 내 보기엔 둘 다 짐짓 놀랬던 게 분명하다. 헌데 반응들이 왜 이렇게 예상과 다르지? 아니라면 분명히 둘 다 놀랬으나 반응이 다른 거겠지? 둘째 아이는 아직 이런 상상의 대화가 가능한데 첫째 아이는 진지하긴 했지만 믿지 않는 눈치다. 설마, 이런. 벌써 이렇게 큰 건가?

마냥 어리기만 한 듯 한데 어느새 생각이 자라고 몸이 자란다. 아직 애기 같은데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점차 아이의 독립심을 응원하고 스스로 잘 자라고 있음을 부모로서 인정해야 할 때다. 품을 내어주고 시간을 내어주자던 다짐으로 영유아기를 함께 했다. 아이가 늘 엄마를 찾는 게 익숙했다. 아직은 작고 어리기만 한 아이 같은데 그 생각이 과거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은지 들여다 봐야 할 때이다.

여전히 엄마의 품에 파고들 때도 많지만 어쩌면 이제 친구의 자리가 점차 커질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인 것 같다. ‘아이가 성장하는 만큼 부모로서의 역할도 성장해야 하는 때’ 말이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아이가 해내는 것을 지지하고 실수를 보듬어주고 말이다. 학령기의 아이가 제 속도와 발맞추어 걷는다. 아이는 언제나처럼 잘 자란다. 이제는 현재를 직시하고 그에 따른 행동과 마음가짐을 할 수 있도록 나를 되돌아보는 지점이다. 아이처럼 엄마도 한 걸음 더 성숙해져야 할 때다.

신문을 읽고 있는데 옆으로 다가온 딸이 문득 건넨 질문.

 

“엄마, 로봇이 다 일하게 되면 사람은 어떻게 일해?”

“오, 사랑아. 정말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해.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로봇이 할 수 없는 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말이야. 이미 우린 로봇청소기가 청소하고 식기세척기가 설거지를 해줘. 짱구가 알아서 음악을 틀어주고 핸드폰 하나로 전등을 켰다 끌 수도 있잖아. 어쩌면 앞으론 이것까지 모두 알아서 해 주는 로봇을 고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네가 살게 될 인공지능 세상에서는 우주까지 다녀오는 일도 타 지역 이동하는 것처럼 편리해질지도 몰라.

 

그러니 딸아.

네가 살게 될 인공지능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건, 네가 누구인지 잊지 않는 힘이 필요할지도 몰라, 인공지능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네가 인공지능을 다룰 수 있는 힘이 필요할거야.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고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일 수 있는 힘. 깨어있을 수 있도록 늘 책을 가까이 하고 네가 너답게 살 수 있는 힘 말이야. 너만이 할 수 있고, 네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우린 찾아야 할 거야. 당장에 다 알지 못하더라도 그건 우리가 앞으로 더 찾아보자.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게 말이야.

 

괜찮을거야. 분명한 건 더 편리하고 좋을 수도 있겠지. 너를 잘 안다는 건 더욱 자유롭고 너다울 수 있는 거니까.”

답은 스스로 찾아나가는 거야.

2021. 8. 3. 07:01 | Posted by Musicpin

 “엄마, 우리 반에서 00하고 00가 수학을 제일 잘해.”

“나는 잘 못해, 문제 풀고 앞에 나가 검사 받을 때도 늦게 나가는 편이야.”

“수학을 잘 하고 싶니?, 학원을 다녀볼까? 아니면 매일 수학공부를 꾸준히 해 볼까,”

 

초등학교 2학년, 지금은 여름방학.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하고 세 자리 수의 덧뺄셈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 연습이 되고 익숙해져야 풀 수 있는 기본적인 셈을 아이는 매끄럽게 해내고 싶은 거였다. 속으로는 내심 씨익 웃었다. 드디어 공부를 잘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다.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잘 하고 싶을 때가 오면 그 때 공부의 적기이리라 생각을 했었다. 엄마가 심어주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학원을 다니게 하는 것도 아닌, 스스로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해보자고 마음먹는 힘. 그 마음이 일 때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어느새 스스로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 온 거다.

 

학원이 빠른 길이 되어 지름길로 안내해줄 수 있다. 문제를 풀고 답을 맞추고 시행착오 없이 술술 풀리게 연습도 할거다. 물론 알지만 나는 더 먼 것을 봤다. 스스로가 문제를 인식하고 알아차리고 풀어내려고 노력하는 끈기, 끙끙대고 혼자 풀어냈을 때의 성취감과 만족감, 내가 해냈다는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긍심. 그건 학원에서도 세세하게 심어주기 어려운 마음의 작동이다.

 

‘나도 00을 잘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곧 동력이 되어 아이의 삶을 이끌어 줄 거다. 그 모양새가 ‘수학’이지만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만나는 어려움이나 막힘은 이렇게 시도하고 저렇게 접근하면 풀리더라 라는 삶의 지혜이자 행동의 실천 같은 것을 말한다.  자신 스스로가 잘 하고 싶고 해내고 싶다 생각을 하고 마음을 먹었으니 행동은 무던히 할 수 있다. 부모는 그저 살짝 안내만 주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고 나란히 발 맞춰 걸으면 된다. 이래라 저래라 혹은 이렇게 할래, 저렇게 할래 답을 주어선 안 된다. 답은 스스로 찾아나가는 거다. 부모가 알려 주는 게 아니라.

 

문제 풀이를 하루에 몇 장씩 풀어보면 좋겠느냐, 꾸준히 생각하고 연습하다 보면 잘 하게 될 거라고 응원하고 함께 계획을 짰다. 아이는 스스로 몇 장을 풀 수 있겠는지 감안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양을 본인 스스로 생각해 정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도를 계획했으니 미루거나 힘들어 하지 않을 거다. 자신과의 약속과 행동하며 지킬 수 있는 힘도 기르게 되니 이 또한 삶에서 필요한 자세다. 부모로서 옆에서 지켜보며 마음으로 응원하고 발맞춰 걷기를 한다.

 

미리 알려주면 물론 편하기는 하겠지만 편함이 가져다 주는 불편감도 분명히 있다. 나는 아이가 제 속도에 맞춰 커나가길 바란다. 웃자라거나 겉만 번지르 하다거나 쉽게만 자라 쉬 부러지는 연약함이 아니길 바란다.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 제 발걸음에 걷는다면 아이는 자신의 본 모습으로 자기답게 커 나갈 수 있다. 아이가 가진 본연의 생명력과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믿는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하지?

2021. 8. 3. 05:58 | Posted by Musicpin

아이들의 감성은 간혹 생각지 못한 울림을 주는데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엄마, 빗방울이 작은 별이 되어 쏟아지는 것 같아”

“물 위에 작은 별들이 무수히 쏟아져”

 

계곡에서 물놀이하던 중 잠깐 지나가는 가벼운 소나기. 물 위에 물이 만나자 파동이 인다. 여기저기서 파동이 피어난다. 자신이 앉은 튜브 주변으로 작은 동그라미들이 무수히 피워지는 것을 보더니 아이가 뱉은 말이다. 놀다가도 갑자기 툭 하고 뱉은 말에서 감동을 일게 하는 경우가 많다. ‘작은 별들이 쏟아진다’라는 시적인 표현에 우리 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감탄을 했다.          

 

여자아이 남자아이 할 것 없이 아이들은 모두 제각기 시인이자 감수성 천재다. 몸으로 느끼고 놀고 아우르는 아이들에게는 편견이나 판단이 없다. 그저 자연 그대로 흡수한다. 옳고 그르다가 아니라 자연 자체가 곧 삶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 체험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것. 아무런 제약도 없이, 무언가 제한하는 것 없이 무한하고 자유롭다.  

 

아이들에게서 한 수 배운다. 아니, 미래세대에게서 배운다. 어린 애가 어떻게 알지가 아니라 한 수 가르쳐 주니 감사하다는 의견이 더 옳을 것 같다. 어른이 되어 편견에 갇히는 나에게 틀을 깨라는 깨우침을 주는 것 같으니 말이다. 동심은 순수함이다. 순수함은 온전하다. 따뜻하다.

집에서 출발 해 15분 남짓. 계곡에 도착한다. 사람 많지 않고 주차할 곳이 코 앞이고 지금 우리 아이들이 물놀이 할 수 있는 딱 알맞은 깊이의 물이 졸졸 흐른다. 나에게는 발목에서 무릎까지 오는 깊이인데 아이들 챙기면서 자연을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충만하다.

알맞은 곳에 자리를 펴고 물에 발 담그고 앉아 졸졸졸 흐르는 물 소리를 들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사이사이로 지나가는 물고기를 만나고 다슬기가 느리게 이동한다. 다양한 물 속의 곤충들을 보고 잡는다. 어깨 사이를 넘나들며 날아다니는 나비들의 춤사위에 나의 마음도 함께 살랑살랑 바람이 된다. 아이들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니 자연스레 몰입도가 높아진다.

가까운 곳에 자연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마음만 먹으면 늘 갈 수 있으니 의지만 발동하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겉치레 없이, 남의 시선 신경 쓸 필요도 없이 그저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온다. 놀이 가방 어깨에 툭 걸치고 가장 편하게 출발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나답게 열어 보일 수 있는 것, 그 점이 참으로 좋다. 화려하기만을 바라지 않고 허례허식만 채우고 있지 않은 그저 온전히 나다울 수 있는 시간. 그 점에 늘 자연을 찾게 된다.

장난감 배를 물에 띄우며 나란히 걷다가 아이가 말한다.
“엄마, 물길이 빠를 때는 배도 엄청 빠르고 내 걸음과 비슷한 속도로 흘러갈 때도 있고, 떠내려가다 제자리에 멈추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고 막히기도 해. ”
“막히거나 제자리에 머물 때는 어떻게 해?”
“응. 그럴 땐 물이 흐르니까 기다려주면 알아서 제자리 돌다가도 배가 흘러가고, 너무 안 움직일 때는 살짝 방향을 바꿔주면 배가 다시 흘러가.”

순간 멍해진다. 이런 세상의 지혜와 같은 주옥 같은 말을 뱉다니. 어른이 되어서 잊어버렸을까. 인생의 지혜를 아이가 툭 내뱉은 말에 멈칫한다. 내 삶에서 머무를 때, 멈추어야 할 때, 내 걸음과 비슷한 속도로 걸어야 할 때는 언제였었나 되돌아 보기도 하고. 빠른 물길에 순풍 달 듯 항해하던 건 언제였을까 떠올려보기도 한다. 진리라는 건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더니. 갑자기 훅 하고 내뱉은 아이의 언어에 나의 마음은 온통 장사진을 이룬다. 더듬더듬 이 때가 그 때일까 그려보기도 하면서.

배는 알아서 흐른다. 이렇게 저렇게 손 대지 않아도 알아서 묵묵히 흐른다. 나의 배 역시 지금도 앞으로도 자연에 맞긴 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잘 흐르다가도 머무를 때가 있고 잘 걷다가도 막힐 때가 있을 거다. 그럴 땐 기다리거나 방향만 살짝 틀어주면 배는 알아서 자연스레 계속 흐른다. 조급하지도 빠르지도 않게 나의 속도로. 나의 걸음걸이로 걷는다.


아이를 키우는데 완벽이라는 말이나 가당키나 할까. 이건 예술을 정의할 때 어떠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예술은 아름답다는 말을 넘어서지만 육아는 처절하다는 말을 넘어서는 무언가다. 살아있음이고 현재에 존재하는 거고 매일이 체력전이다.

명상이 필요하시거나 수행이 필요하신 분들에게 육아를 권한다. 한바탕 뒹굴고 나면 혼자만의 시간이 얼마나 달콤한지 한 줌의 잠이 얼마나 맛있는지 절로 깨닫는다. 누군가에게는 육아가 호강일지 모르나 사람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배우는 것도 육아다. 나의 숨쉬는 것까지 닮을 아이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지고자 무던히 노력하는 점에는 수행이 따로 없다.

좋은 습관을 장착하고 마음에 영양분을 줄 긍정적 마인드로 세상을 보며 뒤따라 오는 아이들의 삶에 좋은 것만 되물림해주고자 뼈를 깎는 고통으로 자신을 들여다본다. 리모컨이 냉장고 안에 있다거나, 갑자기 주제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그거 뭐지? 왜, 그거 있잖아. 폐경이 다가오면 겪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라고 풀어서 이야기할지라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해나갈 수 있는 힘에는 당연코 ‘엄마’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뛰어넘는 불굴의 의지랄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속삭일 수 있는 건 아마도 ‘엄마’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도 ‘엄마’라면 온전히 믿고 의지하고 오롯이 사랑해주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을 들여다 보면 나는 누군가에게 이토록 소중한 적이 있었을까 절로 깨닫는다.

'MEcosystem > 도담도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하지?  (0) 2021.08.03
떠가는 배는 물길이 막히면 어떻게 할까.  (0) 2021.07.29
오롯이 둘이서만.  (0) 2020.10.21
드디어. 매일 등교  (0) 2020.10.21
사춘기가 오기 전에.  (0) 2020.10.12

오롯이 둘이서만.

2020. 10. 21. 10:30 | Posted by Musicpin

아침에 딸아이 등교를 한 후 아들 등원을 위해 분주하다. 누나 없는 시간은 엄마를 독차지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때론 그 시간이 너무 좋아서 소중한 장난감들을 죄다 빼오며 같이 놀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어린이집으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엄마와 단둘이 끝말잇기 게임을 하자면 아들 얼굴엔 깔깔깔 연신 웃음꽃이다. 두 손 꼭 잡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기도 하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하고.

등원을 함께 하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다. 그야말로 사랑 통장에 사랑 가득 채울 수 있는 달콤한 시간. 매일 함께 하는 등원은 행복한 하루를 만드는 시작점이 된다. 어린이집 도착해서 건네는 굿바이 뽀뽀, 포옹과 사랑해 속삭이는 우리만의 수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드디어. 매일 등교

2020. 10. 21. 08:00 | Posted by Musicpin

기다리고 기다리던 매일 등교를 한다. 월요일부터 순차적으로 1학년은 오전 8시 40분까지 등교해서 12시 10분에 끝난다. 어린이집은 정상 등하교(오전 9시 30~ 오후 3시 30분)이고.

엄마의 오전 자유도 좋지만 그 전에 딸아이가 간절히 원하던 매일 등교를 할 수 있다는 점에 더 반갑다. 입학식부터 기다렸으니 꼬박 8개월을 기다린거다.

그간 들고 다닌 무거운 책들은 책상 서랍이나 사물함에 보관하고 왔단다. 친구들은 어떠냐니까 이름은 아직 모른다고. 첫 술에 배부를 수 있나. 차근차근 알아가면 되고 어울리면 되니 조급하지 말자고 다독인다. 학교가 너무 재밌다며 웃는 딸아이의 수줍은 미소가 말갛다.

'MEcosystem > 도담도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아는 완벽과는 거리가 먼 시공간이다.  (0) 2021.07.22
오롯이 둘이서만.  (0) 2020.10.21
사춘기가 오기 전에.  (0) 2020.10.12
슬기로운 추석 생활 no. 5  (0) 2020.10.06
슬기로운 추석 생활 no. 1  (0) 2020.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