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크린 말들
이문영
들어가며
두 세계를 구성하는 두 언어가 있다.
언어는 거울이면서 거짓이다. 삶을 비추기도 하지만, 삶을 비틀기도 한다. 삶을 조응하기도 하지만, 삶을 조롱하기도 한다.
《한韓국어가 언어의 표준임을 자임할 때, 한韓국이 국민의 표준을 지정할 때, 표준에 끼지 못한 사람은 한恨국에 산다.》
편견.
어쩌면 저렇게 살까. 길에 몸을 뉘일 시간에 일이라도 찾아서 하지, 자신을 저렇게 내버려두고 싶을까.저럴 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책이라도 읽지. 젊을 때 뭐했길래 여태 저렇게 살까. 동성애가 어떻게 사랑이야, 문제가 있는 거지.
오해.
마음 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잘 살면 되지 왜 안 된다고만 하는 걸까. 해보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고 결과만 바라는 거 아닌가? 열심히 살면 저렇게 안 됐을 텐데. 얼마나 못 살았으면 그럴까.
무시.
못 사는 나라에서 시집온 애들이라던데, 아저씨 같은 남편과 사는 건 괜찮을까. 아이들은 어떻게 키우려나. 내 아이가 『다문화』 가정 아이와 어울린다면? 믿음도 없는 애가 며느리가 되어서는. 가족이 별 볼일이 없네.
무관심.
표준 범위를 벗어나는 지점 어딘가. 길에서 리어카 끄는 사람, 길거리에서 물건 파는 사람, 지하철에서 본 노숙자, 광고 속 한 끼 밥을 걱정하는 아이, 정규직과 비 정규직이 노조 운운하며 대치를 이루는 뉴스 보도,
텃새와 배척.
내가 옳은 거다. 내가 속한 여기가 정답이다. 나와 다르니 넌 옳지 않다.
상대적 안도감 그리고 우월감.
나는 저 정도가 아니니 다행이다. 정신차리고 다른 사람들이 저렇게(무관심, 편견, 오해, 텃새와 배척, 무시) 보기 전에 나는 더 잘 살아야지. 뒤지지 않을 정도, 누리고 있다 보일 정도로 잘 꾸며야지. 없어 보이지 말아야지.
부끄러움.
알지 못하면서 다 안다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으면서 다 보이는 척 뻔뻔했다. 내가 노력해서 이룬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노동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걸 마주하기 두려웠다. 책을 읽어나가는 내내 얼굴 들기 힘들었다. 세상이 만든 잣대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안도하면서 나는 저렇게 안 되겠지 불안해도 했다. 부끄럽다.
돈의 가치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37p.), 노력해도 달라질 것 없다는 사실(38p.), 여공에서 버스안내양, 식당 아줌마, 공장 아줌마, 청소 할머니, 평생 이름이 한 순간도 중요한 적 없었던…아무것도 아닌 여자, 저임금노동(73p.~96p.), 죄 중의 죄는 쉬는 죄,대기업은 우리의 골을 빨아먹는다(109p.), 찬란은 빈곤을 묻어 감췄다(111p.), 감정을 ‘잠시 멈춤’한 채 절차에 따라 패스트하게 움직이는 회로의 부품(174p.), 최저 임금과 고독사, 부모와 나라의 희망을 달고 먼 길을 달려왔을 어린 청춘들. 책임지지 않는 어른들로 인해 저 밑에 수장된 어린 생명들.
열심히 살아도 수직으로 가팔라지는 가난은 메꿔지지 못해 허덕인다.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았나. 가정을 이루고 부모이고 아이들을 키우고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서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그것마저도 짓이기고 짓밟힌 삶이 있다. 그들 앞에서 열심히 사세요 말이나 붙일 수 있을까. 잣대를 댈 수나 있을까. 하소연 할 곳 없이 묵묵히 견디기엔 대가가 참혹하다. 나라를 뺏긴 통에 당했을 부당함을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시하며 당연시하는 이분법이 존재하는 나라. 사회 구조적 문제,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기 위해 값싼 가격에 부린 노동. 인권이 없는 현장과 구조적 흐름. 가난한 노동 착취 위에 세워진 부가 나는 부끄러워졌다.
300p. 우리가 말이오. 마음 한구석이 짠헐 때믄 말이오. … 무슨 보상을 혀달라는 기 아니란 말이오. 그냥 좀 알어 달라는 말이오. 그냥 좀 알리 달라는 말이오. 우리가 억울헌 일 당혔다꼬 말이오. … 색안경 쓰고 보지 말고 말이오. 우덜도 사람인께 좀 따뜻허니 봐달라꼬 말이오.
그들은 많은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알아달라고. 알아만 달라고. 이런 사람도 있다고. 허망한 언어들이 나에게 와서 부딪힌다.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미안하다는 것과 그들의 노고 덕에 얼굴 들고 산다고 고백하고 싶다.
480p. 우리가 집(시멘트)을 짓고 그 집을 덥혀(석탄ㆍ전기)온기를 얻을 때, 도시를 밝히고 (전기) 그 편리(서비스) 아래서 먹고(밀) 사랑(표준어 대사전)할 때, 더러움(얼룩)을 지워 깨끗함을 얻고 병균을 가둬 청정(천국)을 보장받을 떄, 우리의 편안한 일상은 ‘우리 밖’의 가혹한 현실 위에 서 있다.
우리의 무탈을 위해 위험해지는 땅(섬)과 우리가 외면한 일을 대신하는 사람들(한국). 그들을 몰아넣고 밀어내며 유지되는 나라(우리나라).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지는 그 순환(세월)의 끝엔 결국 우리가 있다. … ‘우리’의 편안한 일상을 지탱하는 ‘우리’의 가혹한 현실을 발견하는 것이 이 시대 언어와 문자의 최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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