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커피란
아가씨 적엔 언제 마셔도 맛있기만 했다. 눈 뜨자마자 마시고 오전 열시쯤 상쾌하게 마시고 점심 후엔 소화시키려고 마시고 오후 3시쯤엔 졸음을 쫒아내려고, 저녁 후에는 디저트로 마셨다. 커피는 일종의 습관이었고 생활이었다. 주목적은 졸음을 쫒아 내거나 활력 있는 하루를 위해 마셨다고 봐야 한다. 잠깐 쉬어가는 낭만이기도 했고 때론 수다의 장이기도 했다.그 때는 언제 마셔도 몸이 잘 소화해줬다. 하루 중 언제 마셔도 맛있었고 마실 때마다 새로웠다. 달콤했고 부드러웠다. 깔끔하면서도 고소했다. 건강하게 잘 마실 수 있는 것이 커피였다. 건강과는 무관하게 멋으로 마시기도 했다. 아무래도 소화력이 남달랐던 것 같다.
육아를 하면서는 의미가 달라진다. 마음으로는 조용히 앉아 여유 있게 마시는 한 모금을 갈급하지만 숭늉 마시듯 한 모금에 들이켰다. 그냥 먹기엔 너무 뜨거워 호호 불어마시던 커피가 혹여나 쏟을까 조심스레 마시게 됐다. 그 마저도 칭얼대는 아이를 돌아보다가 다 식어버린 커피를 마주하기도 했다. 지친 심신으로 아이에게 혹여나 짜증이 날까 예방 차원에서 커피를 마셨다. 몸이 힘들면 모든 것이 버거워지기에 각성하기 위해 보약처럼 마셨다. 당시의 커피란 내게 살아내기 위한, 깨어있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싶어 서러움을 토로했던 지난한 시간들을 일종의 서러움과 함께 통과해 왔다.
이제는 커피의 의미가 남다르다. 아이들이 등원 후 여유롭게 한 두 모금 홀짝일 수 있는 시간도 충분히 확보 되었고 디테일한 향기를 충분히 머금을 수 있는 미각도 생겼지만 무작정 마시지 못한다. 건강에 유익한가 아닌가 하는 기준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는 오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밤에 쉬이 잠들지 못한다. 대략 기준 시간을 봤더니 오후 2시쯤이다. 이 시간을 넘겨 커피를 마시면 예전처럼 팔팔하지 못하면서도 밤에 잠들기가 어렵다. 몸은 잠자기를 원하는데 뇌가 깨어있어 오만가지 생각들이 끌고 다니는 듯한 느낌. 몸은 자는데 뇌가 깨어 있어 불균형을 이룬 날은 다음 날 아침이 더욱 피곤하다.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마신 커피가 오히려 독이 되어 잠을 몰아내는 것이다.
언제나 이 균형이 중요하다. 잠을 푹 자주어야 몸 컨디션도 더 상쾌하다. 커피와는 또 다른 나의 신체가 원하는 개운함이다. 과거에 머물러서 그 때는 마시던 걸 지금은 왜 소화를 못하나 나를 탓해도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과거에는 쇠를 씹어 먹어도 소화시킬 위장의 상태가 현재는 면역력 약화와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변화되어진 신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과거에는 몸이 받아들이기 힘들다 해도 무시하고 그냥 마셨을 거다. 내 몸의 건강이 마치 영원한 것처럼 소중한 것을 모르고 말이다. 현재의 만족을 위해 어느 하나는 헌신해야 하는 구조.
습관처럼 찾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또 다른 이미지가 부여된다. 아메리카노나 헤이즐럿 라떼로 여전히 같은 메뉴로 선택해 왔지만 시간이 흘러 내게 부여하는 의미도 달라진다. 상생이다. 지나간 과거를 붙잡고 예전을 떠올려봤자 현재의 나만 괴롭다. 흘러가도록 보내주고 변화되는 나를 알아 받아들이고. 현재 나에게 커피란 2시 이전에 마시는 최상의 여유로움이다. 건강도 챙기고 낭만도 찾고. 예전에는 그저 습관처럼 마셨다면 이제는 건강을 위해 발란스를 조절하는 관계가 되었다. 언제 또 의미가 바뀌게 될지 모르지만 그때는 또 그 나름대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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