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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cosystem/꿈꾸는 맘'에 해당되는 글 46

  1. 2020.08.17 자기만의 방
  2. 2020.08.17 구본형, 깊은 인생 DEEP LIFE
  3. 2020.08.17 달과 6펜스
  4. 2020.08.17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5. 2020.08.17 아주 작은 차이
  6. 2020.08.09 다가오는 말들
  7. 2020.08.09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
  8. 2020.08.06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자기만의 방

2020. 8. 17. 18:45 | Posted by Musicpin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여성과 픽션. 이 주제 어렵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써나가야 할까. 여성이 여성을 제대로 바라본 적 있을까. 여성임에도 주제부터 생소한 여성이다. 살아온 삶이 증거가 되어 주겠지만 기록하지 않은 삶은 공기 중에 흩어지고 퇴색된 낡은 기억의 한 자락으로 머물렀다. 여성임에도 간과하며 살게 된 원인은 어디 있을까. 다른 사람의 언어로 표현되어 지고 타인의 표현으로 고정될 수밖에 없던 여성의 삶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사색의 낚싯대를 드리우고는 여기저기서 번뜩이며 물밀 듯 요동치는 사고의 격정 때문에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여성은 걷지 못하는 잔디밭을 침입하도록 자신을 격동시킨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기억해 낼 수 없다는 울프의 말에 시선이 간다. 여성이 도서관에 들어가려면 대학 연구원을 동반하거나 소개장을 소지해야 한다는 남성의 말을 째려본다. 교회에서 울리는 오르간 소리를 듣고도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한다. 세례 증명서나 사제장의 소개장이 있어야만 예배당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안내인에게 분노한다.

 

여성은 왜 가난한가. 왜 여성이 여성을 말하지 못했는가. 역사는 왜 여성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가. 18세기 이전의 여성들이 아침 8시부터 밤 8시까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기록이 없다. 현재 여성들과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지고 고등 교육과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는 방법들도 많아 졌으나 이용하는 것은 극소수일 뿐. 대부분 여성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팔자이려니 생각하고 그저 벌어지는 하루하루를 산다. 일 년에 500파운드라는 고정 수입만 있어도 햇빛을 받으며 살아가기에 충분하는다는 문장과 맞물리며 쓰라림을 느낀다.

 

일례로 주어진 셰익스피어와 그의 누이의 사례는 가슴이 아프다. 동등한 가정환경임에도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유로 교육 받는 환경과 분위기가 상반된다. 아버지에서 남편으로, 남성들 사이에서 물건처럼 넘겨지며 살아가는 힘없는 여성의 삶이 베일에 가려 사라지고 없다. 무수히 많았을 그들의 욕구는 스스로 베일로 가리려는 익명성으로 사로잡고 있다. 지은이가 없는 시나 민요 등이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울프의 말에 백번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막대한 중요성을 가질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여성이 열등하기보다는 남성이 우월하기를 바라는 뿌리 깊은 욕망이 잠재해 있다고 본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왜 여성 작가나 화가, 작곡가는 없는 것일까. 왜 역사는 남성들 위주로 기억되어 있는 것일까. 자신의 삶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덕분에 남성은 더욱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

 

여성이기에 더욱 더 글쓰기를 해야 한다.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과 의식을 지녀야 한다. 그와 함께 여성은 더 이상 보호받는 성이기를 그만 두어야 한다. 여성이기에 이렇게 살아야한다는 평범함을 다시 한 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일정한 고정 수입이 기반 되어야 자유로울 수 있다.

 

의식의 흐름을 풀어내듯 써내려간 글 사이에서 여성의 삶을 본다. 하나의 주제를 사색하기 위한 공간이기보다 틈틈이 들어오는 현실(음식의 메뉴와 맨 섬 고양이)에도 눈길이 간다. 울프가 역사 흐름과 더불어 써내려간 여성의 삶에 깊이 사색해 볼 일이다. 어느 성이 더 우월하다 고집하기보다 남성적인 힘과 여성적인 힘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정신적으로 협력해야 정상적이고 편안한 상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회에는 분명히 여성으로서 유리벽이 존재한다. 결혼이라는 제도와 육아라는 관문은 여성에게 자유롭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 길을 여성으로서 더더욱 몰입하고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과 작은 돈과 글쓰기로 나만의 언어를 표현해야 한다. 누군가에 의해 정의되어지는 것이 아닌 나만의 언어로 나의 삶을 풀어나가야 한다.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글쓰기야말로 강한 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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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깊은 인생 DEEP LIFE

2020. 8. 17. 18:43 | Posted by Musicpin

 

 

 

이야기 시작부터 마음을 울린 책. 구본형 작가님이 대단한 분이다 생각하긴 했지만 이 책에서 유독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아마도 현재의 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그런 것 같다. 그런 나라도 자신의 신화를 그려 넣을 수 있고 평범함에서 위대함으로 가는 영웅 여정이 있음을 작가는 격려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의 도약, 천재란 무수한 노력이 모여 만들어진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해서 아직 가슴에 별 하나 품고 있는 너 역시 언젠가는 반드시 빛날 날이 올 것임을 이야기 해 주는 그가 나에게 힘을 주었다.

 

간디의 마리츠버그 역. 마리츠버그 역의 우연은 간디 한 사람만이 아니라 우주가 준비된 사람에게 그들의 운명을 알려주는 신비한 고지의 방식이라는 것. 위로를 받았다. 나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하고 이대로 멀어지는 듯한 나의 꿈을 준비하는 기간이니 힘내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15p. 내게도 마리츠버그 역이 존재했을까? 내 인생의 마리츠버그는 어디였을까? 나는 그 터닝 포인트에서 어떤 정신적 도약을 하게 되었을까? 평범한 사람인 내게는 아직 간디의 마리츠버그 역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내 역사를 뒤져 이 질문에 대답한다. 아직 그때가 오지 않았어도 좋다. 나는 기다린다. 그러나 그저 마냥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준비한다. 준비하고 또 준비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직 땅에 속한 어린 새가 바름을 타고 떠오르듯 하늘로 날아오르게 된다. 도약의 지점마다 삶의 하늘을 나는 날개를 얻게 되었으니 그때마다 위대함의 하늘로 조금씩 떠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내 꽃도 한번 찬란하게 필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깊은 인생으로 들어서는 문’ 중에 ‘깨우침의 문’을 지나 두 번째 ‘견딤의 문’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침묵의 10년을 고독하게 지내며, 선택한 삶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끈질기게. 이 끈질기게 라는 단어가 나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육아의 길. 언젠가는 끝이 있겠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은 마음도 있다. 아니면 적어도 나의 시간 조금이라도 허락하는 상황이 되었으면 하는 원망도 있다. 육아의 길은 왜 이렇게 험난한 것일까. 아니 험난하다기 보다 질척이는 일들이 많은 것인가.

숨통이 막혀오는 상황. 모두 나만 바라보고 나에게만 의지하는 것 같은 숨막힘. 그러나 그 책임은 누구에게도 있지 않다. 오직 나에게만 있다. 이 상황에서 과연 나의 꿈을 꾼다는 것이 가당키는 하는 것일까? 주눅이 들 때가 많다. 허무맹랑한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닌지 나를 다그치게 되는 순간도 있다. 헌데 작가는 끈질기게 붙어있으란다. 끈질기게. 그래. 끈덕지게 붙어있는 것이 또 내 장점 아니던가. 끈질기게 매달려 있는 것이 나만의 특기 아니던가. 특기를 살려 끈덕지게 매달려 있는 것. 거기에 가슴 속에 품은 작은 별 하나 잊지 말고. 간혹 꺼내어 보며 나를 다독이고 끈덕지게 붙어 있어 보자.

 

나는 지금 초라한 ‘그늘 경험’ 중이다. 내 존재에 대해 재정의 하는 중요한 시점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침묵의 10년’ 적어도 이 정도의 긴 기간 동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땀의 시간을 보내야 그럴듯한 창조적 작품이 나온다는 것. 세월과 반복의 힘. 매일하는 훈련.

어떤 분야가 되었든 그 분야의 대가가 되려면 자연스러움과 간결함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 바로 이 경지에 다다르려면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을 잊지 말자.

 

⟪47p. 나는 간디나 체 게바라처럼 크고 빛나는 별은 아니다. 나는 작은 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빛나야 할 운명을 가진 별’ 이다. 사람은 모두 별이다. 자신의 내면에 커다란 빛을 품고 있으면서도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 장막으로 빛이 가려진 별들. 이 평범한 별들을 찾아 자신의 이야기를 창조해냄으로써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움별. 그 별이 바로 나임에 틀림없다. ⟫

 

나에게 울림이 있는 글귀.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우주적 소명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루하고 지리한 지금의 삶에 끈덕지게 붙어 있다보면 알게 될까? 정말 알 수 있을까?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면서도 궁금해지는 나의 미래. 그것조차도 작가는 짐작할 수 있었나 보다. 견디란다. 아직은 나의 때가 아니니 그저 견디라고, 고독과 친해지라 응원한다. 그래, 지금 걱정만 한다고 당장에 어떠한 결론이 나는 것도 아니니 작가의 응원대로 매일 걸어보자. 평범한 자가 비범한 자를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 분야를 정하고 들이파는 것이란다. 침묵의 10년, 고독한 10년, 궁핍한 10년. 누구든 우드스턱의 시대를 거쳐야 한다면. 한번 해 보자. 나만의 신화는 무엇인지 기쁨으로 참여해 보자. (17년 어느 날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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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2020. 8. 17. 18:42 | Posted by Musicpin

 

 

 

처음 제목만 들었을 때는 뭐랄까. 제목 자체부터가 굉장히 생소한 느낌이었다. 제목이 왜 ‘달과 6펜스’지? 궁금증이 들었다가  309p. 작품해설을 보고 궁금증이 풀리며 책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높아졌다.

 

310p. <달>과 <6펜스>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세계를 가리키는데 둘 다 둥글고 은빛으로 빛나지만 둘의 성질은 전혀 다르다. 달이 영혼과 관능의 세계, 또는 본원적 감성의 삶에 대한 지향을 암시한다면,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계, 그리고 천박한 세속적 가치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사람을 문명과 인습에 묶어두는 견고한 타성적 욕망을 암시한다. <달과 6펜스>는 한 중년의 사내가 달빛 세계의 마력에 끌려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빗대어 보자면 현실적 가치와 이상향(꿈)에 대한 삶의 가치를 논할 수 있을 책이겠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가슴에 일으켜진 소용돌이를 쉬 잠재우지 못하고 여러 가지 생각에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이래서 명작이겠구나 싶다.

 

책의 맨 뒷표지에 이런 설명이 나온다.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과 인간 문명에 깊은 염증을 느낀 젊은 세대에게 영환의 세계와 순수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킨 작품. 가까운 현실 문제를 떠나 모든 이에게 내재된 보편적인 욕망, 즉 억압된 현실을 벗어나 본마음이 요구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강렬한 소설.> 본마음이 요구하는 자유로운 삶으로의 욕망. 그것은 내 안의 목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이는가를 생각하게 하기도 했다. 남들이 가고 있는 길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이라고 해서 무작정 따르는 삶의 패턴이 과연 옳은 것인가.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 가장 큰 세 가지는 이것이다.

 

첫째. 세속적으로는 어느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 내면의 목소리 또는 신비로운 열반(涅槃), 아니면 진리나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미련 없이 떠나는 용기.

둘째. 스트릭랜드가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

셋째. 세속의 삶과 인간에 대한 태도와 우주의 비밀이나 진리를 찾아 들어가게 된 태평양의 외딴 섬에서의 자유한 삶. 그리고 신비한 그림. (세속적 삶 vs. 자유한 삶)

 

스트릭랜드는 행복했을까. 죽음의 그늘도 두렵지 않아 하며 신이 주신 경지에 올라 그린 그림은 과연 어떠했을까. 자신의 내부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어떤 힘에 이끌려 빈곤이나 고통, 병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지 않은 행동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책을 읽어나가면서 굉장히 다양한 감정과 마주했다. 나는 과연 6펜스의 삶인가, 아니면 달의 삶인가. 철저히 달을 쫒는 스트릭랜드의 삶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 하나하나에도 몰입되었던 건 내 안의 그들과 닮은 어떤 것들이 있기 때문이겠지.

 

초반 부 자신의 가족을 냉정하게 버리며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스트릭랜드가 이기적으로 보였으나 한편으론 스트릭랜드처럼 사는 이기적인 행동이 점차 부러워졌다. 자유.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함이 부러웠다. 어느 것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이 원하는 것을 찾아다니는 열정에 나의 심장도 뜨거워졌다. 내 안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 아니면 내 안의 두드리는 목소리에 답하기 위해 외부적인 어떤 것도 제약이 되지 않는다는 것.

내 안의 목소리,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신비로운 열반의 경지, 신의 영역을 표현하는 열정에 외부적인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그 사람의 용기가 나를 자극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소명대로 산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가슴이 너무나도 뜨거워 따른 것일까? 내가 진정으로 찾던 그 무언가를 눈 앞에서 보게 된 황홀경은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블란치 스트로브. 그녀는 정말이지 건강하지 못했다. 하긴 세속적 삶을 사는 그 어떤 사람도 썩 이상적이지 않았지만 블란치는 특히 건강하지 못했다. 물론 스트릭랜드와의 관계를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할 수 있지만 동정심이 일지 않는다. 블란치 그녀를 포함해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패턴대로 삶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나쳐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더치 스트로브 역시 그만의 색깔대로 삶을 살 것이고, 스트릭랜드 아내 또한 그녀만의 색깔대로 살고 있음을 책 말미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해관계에 얽히는 것이 한편으론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기도 한 듯 했다. 왜 스트릭랜드가 한치의 미련도 없이 과감하게 떠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책임감도 관계의 얽힘도 없는 행동이 사이다를 마신듯 시원했다. 나에게도 배워야하는 행동인 것 같다. 스트릭랜드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꼈고 나 또한 그러한 삶을 동경하게 됐다.

타인은 타인이고 나는 나라는 것. 지금의 감정이 나의 전체를 대변해 주지 않는다. 관계에 있어서도 나는 나의 패턴대로 타인은 타인이 나고 자란 패턴대로 살 것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 교집합이 있다면 우리는 뭔가 친근한 감정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뿐. 타인과의 관계가 나 자신이 되지는 않는다. 그 점이 명료해져서 시원했다. 내 정신건강을 위해 사람들과의 인연에 깊게 흔들리지 말아야지.

 

영화 모아나로 인해 태평양 해변 어딘가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에서도 그와 비슷한 낙원 이미지가 등장한다. 과연 현재에 익숙해진 내가 편리해진 지금을 과감히 버리고 이상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폴리네시아 지역 어딘가에 원시적인 낙원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내 안에서의 깊은 울림은 계속해서 들리지만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또는 흐릿하고 모호해서 알 것 같기도 한데 도저히 모르겠는 목소리. 울림은 명료한데 보이지 않는 안개에 갇혀 있다면 울림을 마주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었을 것이다. 불안함은 걷어내고 불완전함을 걷어내면서 울림을 마주하기 위해 세속적인 그 어떠한 것도 발목을 잡지 못하는 그 경지.

마침내 자신의 울림을 찾아낸 스트릭랜드는 병에 걸려 아팠을지라도 그게 큰 문제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아 초조해지기는 했을지언정. 자신을 옥죄고 있는 외부적인 것들이 족쇄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죽음도 자신의 열정을 표현하고 그려내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다. 원하던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깨달은 모든 것을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평온해지고 자유해졌을 것이다. 부럽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하다. 신의 경지에 이른 그는 진정 평안해졌을 것 같다. 그 감정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닿지 못해 혼자 두근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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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포근하다. 사진이 많이 있어서 한번 주욱 훑어보았다. 작가들의 일상을 나누는 사진과 소개된 그림책들에서 깊게 숨을 쉬었다. 아, 어느 순간 나는 과정을 생략한 결과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혹여나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마음이 따뜻해졌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감성이 이런 것인가. 어렵지 않은 책이었지만 공간에 머물게 했다. 현재의 나 자신, 지나가는 상황을 바라보게 했다. 갑자기 지나가는 바람도 스쳐가는 태양도 더 자세히 바라보게 된다.

 

p.7 프롤로그 중.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렸으나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살았던 가치가 있다. … 희망, 평등, 우정, 연대, 긍정, 용기....... 나는 가졌고 너는 못 가졌다면서 구분 짓지 않고 어울려 뛰노는 게 좋았던 시절, 친구가 넘어져 울면 안타까움에 눈물을 글썽일 줄 알았던 시절, 감각을 활짝 열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질문하던 시절, 주머니를 채운 딱지, 구슬, 나뭇잎, 자갈로도 만족하고 기뻐할 줄 알았던 시절에 믿고 따랐던 가치들이다.

 

갑자기 나의 어릴 적이 떠올랐다. 잊고 있었던 나의 어린 시절에는 어떻게 놀았었는지 새삼 궁금했다. 관찰하고 상상하고 공상에 살았던 소녀 시절의 나는 지금 찾아보기가 어렵다.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들이 스쳐지나간다. 조급하기만 하여 정말 챙겼어야 할 진정한 가치들을 어딘가에 두고 온 것은 아닐까.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창의성, 상상력, 호기심, 감수성, 창조 본능. 과연 이러한 것들이 아직도 내 안에 있을까.

 

한 걸음 먼저 걸어간 저자가 이 책을 구상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오늘이 행복하지 않은 수많은 어른이 간절히 찾고자 하는 지혜, 그리워하는 근원적 에너지가 실은 어린 시절 읽었던 그림책 안에 모두 담겨 있음을 깨닫고 전율했다.’바로 그림책. 글 언어와 그림 언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그림책. 그 안에서 잃어버린 우리네 감성을 다시 퍼 올리고 싶어 했다.

 

p.9 프롤로그 중.

진즉 어른이 되었지만, 지금, 더 늦기 전에, 오래전 어느 날 잃어버린 생의 감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뭐든 해야 한다고 반복되는 일상에 치여 시들어버린 창조 본능을 가만히 흔들어 일깨우는 살아 있는 이야기를 모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책에 소개된 10명의 그림책 작가들을 나는 함께 만났다. 인터뷰를 하며 주고받은 대화는 마치 내가 그 자리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 했다. 테이블 위에 뜨거운 커피를 앞에 두고 마치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과 철학을 함께 공유하는 듯 하는 착각이 일었다. 사람과 사람으로서 그네들과 나의 다른 점은 무엇인지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짚어보게 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뭉클하게 올라오는 감정을 진정하느라 애썼다. 내 안에 이는 감정을 미처 정리하기가 어려웠는데 다시금 찾아본 차례에서 마저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질문, 바로‘관찰하는 시선, 상상을 만드는 질문, 공감의 쓸모, 치유하는 상상, 작은 용기, 결점에서 태어난 창의성, 깊은 심심함, 다르게 보기, 오래보기, 시간 사용법, 자기 믿음.’이것이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가치와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누군가 나에게 질문한다면 위의 문장들을 나열하고 싶다.

 

빠르게 흘러가는 사회, 경쟁이 우선시 되고 가진 돈에 따라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고 나 이외의 타인을 벗이 아닌 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각박함. 모든 것이 결국은 우리의 영혼이 메말라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우리가 지금이라도 찾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했다.

 

내가 했던 예술마저도 공부라고 생각했던 나다. 악기마저도 분석하려 했던 나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도 어느 순간 학습에 관련된 것들을 집어 드는 나의 모습과 작가들의 모습과 겹쳐졌다. 놀이밥을 먹이고 그림책을 읽어줘야 하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책임감에 의한 것들이 많았던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나의 잃어버린 감성으로 인해 그림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간과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깊은 감동보다는 아이에게 좋다고 하니 해줘야 하는 일종의 부모역할에 머무는 것이다.

 

쉽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게 넘기고 싶지 않은 책이다. 살면서 정말 중요한 가치를 품은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술과 언어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그림책. 올리비에 탈레크가 말했다. “글과 그림이 각각 두 개의 트랙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합니다. 글이 말하지 않은 부분을 그림이 설명하고, 그림이 비워놓은 지점을 글이 채울 것, 글 작가와 그림 작가 두 명의 해석과 관점이 독립적으로 살아 있을 것”삶에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내면의 소리를 따라가는 작가들의 모습에서 나의 삶을 비쳐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책이 될 것 같다.

 

우리 아이들에게, 또 나에게도 그림책을 통한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다. 책 속의 인물이 늘 함께 해 주는 친구와 같은 그림책. 또한 책 속에서 만난 10명의 작가들 모두 배울 점이 많은 훌륭한 부모였고 그들이 해 준 조언도 뜨겁게 다가왔다. 그들에 비춰 봤을 때 나는 어떤 부모인지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도 될 수 있었다. 예술적 감성도 찾을 수 있고 내 삶에 본질적 질문을 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고 부모라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일상 속에서 예술을 누리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그 바람이 나를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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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차이

2020. 8. 17. 18:15 | Posted by Musicpin

알리스 슈바르처 지음

 

아주 작은 차이

 


p.253. 여자와 남자를 구분 짓는 것은 생물학적 요소보다는 문화적 요소.

p.255. 여성해방의 이름과 더불어 여성의 사회지출은 눈에 띄게 늘어났으나, 이는 끌려가는 노예가 아니라 자발적인 노예가 되도록 사회적 여건이 바뀐 것임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남과 녀의 구분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고 작가는 목소리 높여 이야기한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는 아주 뚜렷한 권력의 종속관계로만 성립되었고 그 결과, 권력을 장악한 남자 앞에서 여성이 맡고 있는 역할은 성적인 무력감을 통해서만 자기확인이 되는 셈이란다.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던 여성의 의무라는 것이 실은 소수 남성 권력자에 의한 욕망이었음을. 개탄하게 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장하면서 사회적인 규범에 맞춰야하고 맞추지 못하면 정신적 질환으로 치부해 버리는 정치적 문화에 분개했다. 남성이 지배하는 직업세계에 하녀처럼 착한 여자 노릇을 해야만 하는 여성의 삶. 왜 당연한 듯 살았을까. 어느 누군가 먼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을 때 우리는 같은 여성으로 더 날카로운 날을 세워 바라보고 손가락질 하지는 않았는가. 어쩌면 여성이 여성을, 또는 성별 간의 차이를 지적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내밀한 권력의 음해한 뜻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 생각해본다.

 

p.262. 남성의 정력은 사실 여성과 함께 성적 감흥을 나누는 일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들의 정력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p.267. 가사와 육아, 그러니까 안살림에 해당하는 이런 종류의 노동은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아니라 항상 억압을 당하는 쪽으로 떨어졌던 셈.

p.270. 인간은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그렇게 길들여진다.

생물학적 외관보다 심리적인 성향이 더 큰 작용을 한다는 것. 어머니들이 딸들에게 더 엄격하게 순종을 강요하는 것이지 태어날 때부터 여자와 남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여자아이답도록 길들여지는 것이었다.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답게라는 말도 안 되는 문화적 유산으로 갓난아기 적부터 그렇게 훈련을 받는 것이었다. 성역할을 구분하는 가장 두드러진 사회화 과정은 어떤 것보다 강력한 사회적 요구로서, 여성은 복종하는 훈련을 통해 피동적 존재가 되고 남성은 군림하는 훈련을 통해 능동적 존재가 된다.

가부장제 남성 중심의 시각과 해석으로 여성을 바라보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언제까지 남성의 부속물로만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여자는 독자적으로 생성된 독립된 존재이다.

남자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성과 의존적 태도를 버리고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는 훈련, 자의식을 단련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작가는 목소리 높여 말한다. 실은 사회적인 문화 못지않게 우리 안에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는 열등감과 죄의식 때문에 여전히 크게 변화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남편에 대한 심리적 종속.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인가, 훈련되어 지는 것인가. 남성적 면모라고 일컬어진 적극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을 의식적으로 개발하고 뱃심을 키워야 한다.

 

293p. 여자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남자의 옷을 빨고 아이를 낳아 길러주며 남편의 출세가 내 기쁨이려니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다 결국 껍데기만 남은 채 시들어 버리거나 정신분열에 걸려 자지러지고 만다.

인간은 먼저 인간이다. 그 다음 생물학적으로 여자 혹은 남자라는 것이다. 성별을 가지고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어서는 안 된다. 여자 일과 남자 일을 따로 나누고 이를 통해 한쪽이 다른 한쪽을 착취하는 일을 중단시켜야 한다. 더 이상 임신과 출산으로 여성이 매여 있는 것이 아니고 아이의 양육은 여자와 남자가 공동으로 맡아 할 일이다. 그런데도 어찌 여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가정을 잘 꾸리고 아이들 잘 키우는 것들에 한정되어 있단 말인가.

여자들은 가정주부로 안살림을 맡아서 해야 하고 다음으로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완수해야만 하며 그 다음에서야 비로소 부업삼아 가정 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내조와 육아에 흐트러짐 없는 상황에서 자기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05p. 집안 살림에 필요한 일들을 여성에게 맡겨 버림으로써 가장 중요한 경제자산을 확보한 셈이었다. 산업사회 이전에는 이렇게 자질구레한 일을 하녀나 하인들에게 맡겼지만, 사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남자들은 어느덧 결혼을 통해 각자의 하녀를 하나씩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자기계발을 꾸준히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안의 열등감이나 여성다움이라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 자신부터 여성을 보는 시각을 다양하게 넓혀야 하고 같은 여성으로서 발전을 응원해야 한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비교하며 순위를 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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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말들

2020. 8. 9. 07:46 | Posted by Musicpin

본문 中.

“쌤, 글쓰기를 하면 고통이 사라져요?” 그 말은 정면으로 날아와 가슴에 그대로 박혔다. 화두가 되었다.

글을 써도 고통스럽고 글을 안 써도 고통스럽다. 그러면 쓰는 게 낫다. 뭐라도 하다 보면 시간이 가니까. 슬프지만 일을 하고, 슬픈데도 밥을 먹고, 슬프니까 글을 쓴다. … 서툴더라도 자기 말로 고통을 써본다면 일상을 중단시키는 고통이 다스릴 만한 고통이 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우리 뭐든 써보자고 하면 저마다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다.

7p. 아름답거나 아릿하거나, 날카롭거나 뭉근하거나, 타인의 말은 나를 찌르고 흔든다. 사고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몸에 자리 잡고 나가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숙성되고 연결되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서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이 조금은 된 것 같다.

우리에게 삶을 담아낼 어휘는 항상 모자라고,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크다는 것.

나의 편견을 확인할 때마다 나의 소망은 구체화됐다. 모두를 설득하는 글보다 “한 개인에게만 특수하게 해당되는 몫”을 놓치지 않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본디 글쓰기에는 한 사람 인격의 최상의 측면이 발휘되는 속성이 있다. 그 글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잡아준다. 한 사람을 사연과 이야기의 존재로 바라보면 존경스럽다.

삶을 위무하고 지혜를 안겨주는 보석 같은 이야기들. 이야기 전달자

<다가오는 말들>은 겪은 일, 들은 말, 읽은 말들로 엮은 에세이 모음.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세상에서 내게 온 이야기를 다시 세상으로 돌려 보낸다.

 

 

일상을 살아가는 언어가 와서 부딪친다. <저자의 말>에서도 화두 되었듯이, 과연 “글쓰기를 하면 고통이 사라질까?” 삶을 담아낼 어휘는 항상 모자라고,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큰데 우리는 과연 글쓰기로 나의 삶,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나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글을 써가던 맛을 보던 사람이 더 이상 하지 못하고 미루기만 하게 되었을 때. 갈증이 심화되어 정신이 피폐해짐을 느낄 때. 글쓰기가 문득 문득 떠오른다.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던 나에게도 근심의 층위가 깊어간다. 나를 들여다보는 글쓰기에 목이 마르다. 인간은 최악의 상태에서 진정한 통찰과 만난다(19p.)는 니체의 말에 머무른다. 4월 노력한 헛된 것들이 결국엔 나에게 통찰로 내 몸 어딘가로 남겨졌을까. 이 모든 것들이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결국엔 그 분이 인도하는 길로 예정되어 나를 훈련시키려 고통을 동반하게 하는 것일까? 더 큰 그릇으로 훈련하기 위해 갈고 닦는다는 말은 희망고문이다. 지경을 넓혀가는 과정이 나에게는 숨 막히고 괴롭다. 조화로워야 하고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 나는 자신을 죽여야 한다. 내가 괜찮기 위해 타인에게 적당한 거리를 둬야 하는 외로움에 짓이긴다. 함께 지내기 위해 들어온 조직 안에 나는 숨죽여야 한다. 누구를 위한 삶인가.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던 저자가 이만큼 떠밀려오고 나서보니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말(61p.)에 나를 대입시켜본다. 저자의 말대로 자신이 비정상이 아님을 알고 자기 억압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64p.). 글쓰기를 통해 나를 발견해 가는 과정을 다시금 재생산해야겠다는 다짐이 인다. 외부 소용돌이를 나만의 언어로 순화해 자기만의 언어로 길어 올리는 시간을 다시금 조우해야겠다는 간절함이 인다.

 

당신의 삶에 밑줄을 긋다가 · 우리라는 느낌이 그리울 무렵

인간답게 사는 방법의 탐구로서의 배움(94p.). 사람답게 살기 위해 공부하지만 공부하면서 사람답게 살기는 퍽 어렵다(100p.)는 고백, 공부든 일이든 하나의 목적성에 갇힌 사람은 앞만 본다는 말에 볼이 빨개진다. 타인과 어울리고 싶었다가도 내가 놀 시간이 어디 있나 싶어 공부만 매달리려는 내가 만져진다. 삶은 소풍이라 여행하려고 왔다는데 내 삶은 어디가 여행인건가 싶은 지점이다. 다양한 책들을 간접경험으로 만나는 것에 시선이 간다. 타인의 삶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서 나의 삶을 주인공으로 산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경험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하고 가라앉은 타인들의 언어를 만나면서 우물 안의 개구리가 여기에 있다고 고백하고 만다. 나를 이해하는 글쓰기에만 눈독들이고 있었더니 누군가에게는 이해하는 과정이 생략될 수도 방법을 알고도 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듣는 자의 자세로 임하기를.

 

낯선 세계와 마주했을 때 · 주위를 조금 세심히 들여다보면

안다는 건 자기 무지를 아는 것(237p.),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 일 때, 자기 삶의 문제인지도 몰랐던 문제가 드러난 경험(238p.).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타인에게 상처가 되었을 때. 어쩌면 나만 아는 지식이 정답이 되었다 편견이 되었을 때. 진실을 마주하는 그 순간은 언제나 수치스럽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여 가는데 유독 잣대가 되어 구시대적인 발상을 내뿜게 될 때. 그것만큼 당혹스러운 것도 없다. 마음 둘 곳이 있고 의지할 곳이 있음에도 매 시간 만져지는 일상의 무게 때문에 나만 죽을 듯이 힘들어요 푸념하는 나를 만날 때. 나는 내가 낯설다. 조금만 세심히 들여다보면 각자가 살아가는 삶에서 각자의 과제를 해결해 가며 살고 있을 텐데 유독 나 혼자 힘들다 징징거린다. 나의 틀을 깨는 도끼로, 자기언어를 구사하기 위한 생존의 언어로, 본연의 나로 사는 방편으로 글쓰기는 ‘자기 돌봄’이 된다.

 

기타.

은유 작가처럼 들어주는 사람으로 발 벗고 나서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내 틀을 벗어나 교류할 때 살아있는 삶이 된다. 어우러지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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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태어나는 자리

2020. 8. 9. 07:45 | Posted by Musicpin

책을 내면서

사제의 힘으로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도 신의 따스한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들처럼 탁월한 비평가는 위대한 예술의 세계를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전해 준다. 사람들은 배달된 두부로 된장찌개를 끓이듯, 예술작품으로 자기 삶의 밭을 가꾸게 된다. 오래 전부터 문학을 일상 삶의 차원으로 끌어오는 일을 생각했다.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 문학이 돌아가야 할 자리

삶에서 문학이 태어나고 문학은 다시 삶을 낳는다. 문학에서 이런저런 장치를 걷어내고 나면 삶이 남는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올라도 땅에 뿌리를 박고 있고, 천리를 나는 새들도 끝내는 땅위에서 안식하는 것처럼, 문학도 제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한들, 삶에서 태어나 삶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삶은 문학의 뿌리이자 귀의처인 것이다. 그러니 삶을 빼버리면 문학은 기댈 곳이 없어진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 눈은 글자를 따라가도 마음은 그 글자가 태어난 삶의 지점에 가 있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문학이라는 창문으로 통해 삶을 엿보고, 문학이라는 길 위로 삶을 가로질러 간다. 이 책은 문학이라는 창으로 삶을 엿보고, 밭 사이에 나 있는 길을 거닐며 삶을 돌아본 이야기이다.

각자의 삶과 문학, 그대 삶은 모두 문학의 자궁

 

나에게 있어 감정과의 만남이란 음악이 으뜸인 어떤 것이다. 멜로디나 화음이 들려주는 어떤 감정과 공간감, 리듬이나 악기 고유의 음색이 나타내는 생동감이나 개성 등. 인간이라면 내재하는 모든 감정의 결들은 오직 음악만이 가감 없이 전달된다고 생각했던 일인이다.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에는 오직 음악만이 가장 최고라고 생각한다. 헌데 이 책은 오직 음악뿐이라는 생각을 조금은 유연하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 만져진 인간의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글로 만났다. 절망, 호기, 풍류, 불안, 해학, 풍자, 사랑, 이별, 우정, 동경, 신념, 고독 등. 그대 삶은 모두 문학의 자궁이라는 문장에서 나의 삶과 삶을 살아내며 내재화된 감정들을 반영해 본다. 저자가 풀어놓는 다양한 이야기에서, 유추해내는 감정 감정들에 깊이 공명하기도 한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나의 삶 어떤 지점에서 태어나고 만들어진 특수한 감정을 문학이 달래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에 눈길이 간다. 18p. 문학작품은 때로 대단하고 위대하지만, 그것이 잉태되고 탄생하는 지점은 누구에게나 있는 소박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 가장 피어오르는 감정의 결은 불안이다.

 

112p. 남의 시선을 느끼며 몸을 떨고 있음은 바로 불안의 표지이다. … 나를 향하는 타자의 시선은 불안 형성의 조건으로 자주 등장한다. … 현대인들에게 불안은 타인의 시선으로 밀려온다. … 이 사회에서 감시되지 않는 것은 없으며, 심지어 사람들의 무의식까지도 철저한 계산 아래 통제된다.

 

113p. 살아있는 것은 모두 다 불안하다. … 115p. 우리는 누구나 다 불안하며, 그 불안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불안을 인정하고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살아 꿈틀대는 삶을 만날 수 있다.

 

신랑이 먼저 이동하면 이사 준비를 해야 하는 목표가 생긴다. 아이들의 어린이집과 학교 문제, 급할 때 찾을 병원이나, 보건소. 우체국이나 동사무소, 도서관 등의 행정기관. 근처에 있을 이용시설들을 알아봐야 하고 무엇보다. 사람의 인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어찌 되려나 생각되어 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고, 되도록 텃새가 덜한 곳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비교적 잘 적응하여 별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는 곳이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114p. 신의 품을 외면하고 세상에 홀로서기를 시도한 사람들은 개성과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수반되는 고독과 불안도 함께 떠안아야 했다. … 현대인의 삼우三友는 불안과 불면과 우울이 아닐까?

 

불안은 나의 삶 기저에 깔린 무의식과 나란히 공존하는 무언가이다. 다만 기저에 깔린 불안을 좀 더 자극하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노출이 되어 있는 것 일뿐. 해소하지 못하는 애매함이 또 다른 불안을 야기하는 것.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돌며 감정선들이 만나지는 지점들. 저자에 의하면 그 지점들이 나에게는 사색이 피어나고 문학이 꽃 피는 지점이 아닐까. 해서 저자는 문학은 삶, 삶의 균열에서 나온다했다. 처방의 수준에 따라 효과의 차이야 있겠지만, 문학작품은 최소한 자기가 태어난 지점의 아픔 정도는 달래줄 수 있다고 말한다. 해서 21p. 그래도 살아보라는 속삭임에 마음을 내어준다. 소독약을 바르는 행위, 자기 삶의 부정을 씻어내는 씻김굿,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 절망이 희망을 낳는 것이 아니라, 견뎌냄 그 자체가 희망이 되는 것을 나는 꿈꾼다.

 

극도의 공포와 불안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자기 안에 감추어진 지혜와 용기를 발견하는 동서고금의 신화와 민담처럼. 내 안에 있는 어떤 주인공의 출발로 시작된 이야기는 여전히 흐르고 있고 현재와 함께 한다. 모두 나의 삶의 작은 영웅이 되며, 끊임없는 죽음의 일상을 탈출하여, 끊임없이 거듭나는 것이다.

 

115p. 나에게 글을 쓰는 것은 무엇인가를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불안감을 넘어서게 하는 치료제와 같은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삶의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얻는 지점은 문학이다. 162p. 이야기들은 사회 집단의 내면 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신묘한 거울이다. 불안과 함께 공존하는 법을 배우며 작은 여행들로 일상을 거듭나는 깨우침을 통해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 같다. 그 지점이 바로 문학이 태어나는 지점이다. 이미 작가가 되어주는 내 삶의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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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2020. 8. 6. 10:33 | Posted by Musicpin

 

 

아내와 여성의 이행대, 임시구역 육아.

p. 20년 뒤 어떤 직업이 중요해질지, 안정적인 수입은 보장될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약 10년 동안은 정말 불편한 임시구역에서 살아야 한다. 아니, 그 기간은 그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아이를 낳고 키움으로서 나는 결혼 전의 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출산과 육아는 나에게 성숙의 길로 인도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이대로 취직해서 일을 한다는 것에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내가 만나는 대상의 어떤 한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을 나누어 각각 50분여 만나는 게 고작이지만 그 사람의 일생을 만나는 것과 같았다. 헌데 내가 겨우 손바닥 안에 쥐어지는 자격증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할 수 있을까. 사람이 그 색을 띄기까지 무한히 많은 세월과 문화와 손길이 뻗쳐 있었을 텐데 진단평가 하나로, 초기 작성서 하나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옳기나 한 것일까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그래서 나의 일에, 인격에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내 안에 깊이 침몰되어 있으면 나 역시 내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을 만나기 일쑤다. 결혼 전 나의 이행기에는 깊이 침잠해 있는 것이 전부였다. 헌데 엄마가 되고 여자에서 엄마로의 이행대, 이제 여성으로서의 이행대를 걷고 있는 나는 불안과 모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혼자서 침잠해 있는 것보다 나와 세계의 주고받음을 이해하며 이제 와서야 비로소 내 삶은 나 혼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이 내가 되기까지 수많은 생들이 겹치고 덧입혀지며 만들어진 교집합의 결과물이다.

 

나 혼자만의 시공간에 은둔해 있던 과거를 본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모호함을 뚫고 보이는 두 공간의 경계를 느낀다. 서로의 문화를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며 각자가 가진 철학을 주장함으로 안도감을 얻으려 노력했다. 헌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결국엔 자연의 일부로서 우리는 서로 인정하고 공명하며 삶을 나누어야 한다. 타인과 삶과 교류하며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느낄 때 공동의 미래를 나누는 것이다. 나 그대로 또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살며 배우는 것이다.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의 힘이 있다. 아이도 아이가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자양분을 이미 가지고 태어났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의 경작법, 이 지점에서 엄마라는 역할이 과연 무엇일까 다시 한 번 물어봐야 할 것이다. 자연이 일하는 방식을 알아감에 따라 그에 따른 철학을 지지하고 도와주는 것. 있는 모습 그대로 함께 호흡하는 공존을 나누어야 한다.

 

여자와 아내의 이행대, 여자와 엄마 사이의 임시구역에서 나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희망으로 꿈꾼다. 조만간 나의 이름으로 살날이 다가온다. 그 것이 완성되는 지점이 현재에 있음을, 시간의 원이 완성되는 순간이 여기에 있음을 배운다. 해서 열심히 내조를 하고 아이의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관계 안에서 나의 역할을 바라보기도 한다. 나의 이름으로 살지 못하는 날도 많고 눈에 보이는 수입도 없지만 나의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 이 곳이기에 불안과 불완전함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에 더 중점을 둘 일이다.

 

p.30 시간의 모든 차원이 현재에서 만난다. 과거는 변화하고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우리의 희망을 이런 시간적인 만남에서 배태되는 힘이며, 우리가 무엇을 희망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정말로 중요하다.

 

여자와 아내, 엄마의 삼박자를 채워야 하는 나의 삶은 현재 몇 년 째 과도기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행기, 어쩌면 임시구역 지점인 현재의 시공간은 그래서 더 잠재적인 창조의 씨앗이 가꿔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해서 주어지는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희생을 선택하며 글쓰고 책 읽는 성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현재의 나를 느끼고, 세계와 교류하며, 각각의 존재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 나에게 흘러가는 지금을 그대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난 세월이 여성으로 살아갈 순간들의 자양분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아이를 키워보고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보며 외딴 섬처럼 지내 본 불확실한 나날들이 도움이 필요한 타인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삶을 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 감히 짐작해본다. 함께 나눌 수 있고 있는 그 자체로 의미 있음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연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니 현재를 완성하며 산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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