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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서 이제 막 기저귀를 뗀 아이처럼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가 있다. 이름을 불러도 못 들은 체 하고 본인 하고 싶은 활동을 하는 아이. 자신의 호기심이 우선되어 앞 뒤 순서랄 거 없이 무작정 만지고 행동하고 보는 아이. 사람들이 말하는 산만한 아이도 만난다. 착석이 유지되지 않고 일단 바닥에 눕고 보거나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아이. 혹은 ‘이거 해 보자’ 제안 하면 똑같이 반복하여 ‘이거 해 보자’말하는 아이도 있다.

‘연주해 볼까’, ‘연주해 볼까’
‘00야, 안녕’, ‘00야, 안녕’
‘이것 좀 봐봐’, ‘이것 좀 봐봐’

질문하는 이가 있으면 대답하는 이가 있다는 점이 일상일텐데 내가 만나는 아이들과는 대답보다는 내가 던진 질문이 다시 되돌아 온다. 너무 투명하게 반영되어서 나의 부끄럽고 거짓된 부분까지도 들킬까 내심 흠칫 놀라는 지점. 아이들은 사랑스럽다. 그리고, 맑다. 어른이 되어 있는 나는 부족하고 때론 과장되고 혹은 합리화하기도 한다. 내가 나에게도 부끄러울 그림자가 아이들에게 그대로 투영되지는 않을까, 혹여나 때 묻지는 않을까 거울 닦듯이 아이들을 들여다 보곤 한다.

일일이 체크해 보지는 않지만 우리집 남매와 나이가 비슷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평균이라는 범주보다 늦은 발달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둔다. 어떤 부분에서 지연이 되고 있는지 무엇이 더 시급하게 발달해야 하는 지 꼼꼼히 챙겨보지만 나이도 발달 과정이라는 것도 지금, 여기에서 무엇이 중한지를 묻는 중요한 질문이 된다. 평균이라는 지점이 과연 정답이 될까. 목표 지점이라는 게 과연 누구의 기준으로 만든 지점인지 묻고 싶을 때가 있다.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지만 시험지처럼 점수 매기는 과정은 누구를 위해서인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나의 잣대가 구속하고 규정짓는 행위가 되지 않도록 쓰고 수정하고 다듬고 매만진다.

또래보다 평균적으로 느리다고 해서 그게 잘못된 건 아닐 거다. 지금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시작해 점차 범위를 늘려가는 것이 조금은 더 미래적이다. 언어와 신체적인 균형과, 나와 너를 인식하고 대화하는 상호작용과 더불어 자신 스스로 챙길 수 있는 자아 인식까지. 자신을 인식하고 챙기고 미래를 그리는 노력과 과정에서 아이는 스스로 배울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나는 그저 도울 뿐, 해 나가는 일은 아이들 각자의 몫이다. 생명력은 누구에게나 이미 내재되어 있어 자랄 수 있는 힘이 모두에게 있다고 믿는다. 당장에 읽고 시험보고 점수 매겨지는 결과가 아니라 그 아이만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다만 염려스러운 점은 기다려주고 함께 해 주는 이가 과연 아이 인생에 몇이나 될까, 편견 없이 이 모습 그대로도 좋다고 해 주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점이다. 걱정스럽고 두려울테지만 자라나는 길에 자양분이 되고 거름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랑을 표현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진심이 이거 밖에 없어서 안타깝지만 이거라도 할 수 있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이 앞에 선다.

내 아이가 귀하면 남의 아이도 귀하다는 명제를 가치로 삼는다. 내 아이가 사랑스러운 만큼 내가 만나는 아이들도 사랑스럽다. 각자의 고유한 아이의 내면에는 가 닿지 못할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고 만들어가야 할 미래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챙길 수는 없겠지만 자그마한 지식과 함께 하는 소통으로 아이 인생의 한 부분에 빛이나마 되어 주었음 하는 경이로움으로 아이들과 만난다.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中 202p.

물론 이런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음악만은 아니다. 노인들을 격려하고 관심을 보여주며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노인들의 반응을 보고 시뻐하는 음악가들 역시 큰 몫을 한다. … 이런 만남은 모든 이들에게 생기를 불어놓고 모든 이들을 변화시킨다. …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는 이런 현상을 공명resonance이라 일컫는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전공하고 일할 당시만 해도 치료목적이 먼저였다. 준비해 간 세션이 내담자들에게 잘 되느냐, 안 되느냐가 먼저였고 내가 세운 목적에 따라주느냐 따라주지 않느냐가 보였다. 함께 해 주는 사람들의 반응이 잘 나오면 내가 준비를 잘 해서 인 듯 했고 그것으로 유능감을 느꼈던 아둔한 시절. 부끄럽게도 당시 나의 세션에 함께 해 주는 대상을 염두에 두었으나 보이지 않았다. 과연 저 분들이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가능할까, 정해진 목표에 닿을 수는 있을까, 등등. 내가 먼저였고 준비해간 순서가 우선되었고 잘 치뤄지고 아니고에 초점이 맞춰진, 지극히 ‘나 중심적’인 상태의 세션이었다.

 

육아로 인해 공백을 깨고 다시 임상에 섰다. 예전처럼 장애아동을 만나고 소통이 어려운 사람을 만나는데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그들이 가졌다는 장애는 보이지 않고 오직 음악 시간을 통해 만나는 너와 나의 연결과 공간과 시간만이 존재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점부터 시작해 한 단계씩 오를 수 있겠다 싶은 가능성부터 보였다. 내 말이 들리면서도 들리지 않는 듯 행동하는 장애아동들과도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을 장착했고 웃음과 울음에 함께 웃고 울었다. 지금의 모습이 전부가 아닌 그저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삶에 극히 일부분을 함께 하고 있다는 찰나의 순간을 공유한다.

 

비포 애프터도 아니고 내담자를 만나는 나의 자세와 마음가짐이 왜 이렇게 풍경이 달라졌을까. 육아란 그저 아이를 키우는 노동이라고만 여겼다. 자식의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재우고 먹이는 단순 노동의 순간에서 어서 벗어날 날만을 기다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돌봄과 애씀과 노력이 쌓이고 쌓여 돌도 씹어먹을 내공으로 장착했다면 육아도 이력서에 쓸 수 있을까. 내 자식이 귀한 만큼 남의 자식 귀한 줄도 알겠고 쓰디쓴 내면의 들여다봄으로 인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계기가 육아였음을, 아이들과 함께 한 모든 경험이 자양분으로 녹아 들어 일에서도 의미 있는 가치의 토대가 되어주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아이를 낳고 육아의 과정을 견디며 나는 경력이 단절되었을지 모르나 필수인 저 덕목들이 체화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음악치료사라면 출중한 악기 실력과 음악적 소양과 예술적 센스는 기본일거다. 더불어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인류애. 신체와 마음, 사고에 대한 공부도 필수일거고.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내면에 대한 분석과 자기 공부까지. 언제나 배우려는 자세와 노력하려는 태도도 함께 라면 더없이 좋겠다. 거기에 나의 자그마한 의견을 덧붙이자면 사랑과, 생기, 온기와 조화, 더불어 성장하려는 자세와 이타심이 필수다. 어쨌든 치료사와 내담자로 만난다지만 결국은 너와 나의 공명이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과정에 함께 하기 때문이다. 우린 그저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만 서른여덟의 나를 기념한다. 아가씨 적에 그리했던 것처럼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고 얼굴 근육에 별다른 변화가 없음에도 예쁜 척 한껏 표정을 지어본다. 모처럼 찍어보는 나의 표정과 얼굴이 어색하면서도 이내 마음을 가다듬는다. 지금 찍지 않으면 언제 또 찍어볼까. 기억하고 싶은 순간, 추억에 남기고 싶은 순간, 지금 나의 상황이 가장 아름답다 느껴지는 순간. 이 순간순간들이 구슬처럼 꿰어져 내 삶이 될 텐데 찍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아이에게 온통 플래시가 켜졌다. 꼼지락거리며 세상 전부인 양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좋아서, 지금 아니면 못 찍을 것 같아서, 아이와 함께 보내는 일상이 너무나 소중해서 늘 아이에게 핸드폰을 들이댔다. 그러다 보니 예쁜 척 하는 게 재미없기도 했고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더 반짝이는 아이가 옆에 있는데 오밀조밀한 아이를 찍는 맛에 나를 찍을 생각은 안 했다. 혹은 늘어진 흰 티나 불어난 부피의 무언가가 내심 사진에는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모든 부분의 곳곳이 나 인데도 못나 보이는 모습은 카메라에 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좋아 보이는 것만 나일까, 반짝반짝 할 때만 나 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줄근하고 늘어져 보이는 건 내가 아닌 걸까.남들 보기에 평범한 주부의 모습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 질문했다. 내 삶에서 유일하게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보는 순간들이 보람되고 값진 것이라면 과연 이 순간만큼 더 빛나는 순간이 있을까. 외모가 변한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변한 게 아닐 텐데 엄마라는 역할을 맞이한 순간부터 ‘나’가 동떨어졌다. 돌보지 못하고 지쳐 잠들던 찰나의 순간들에 나동그라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아이가 까꿍이 시절에는 나 자신을 찍어보자는 생각도 감히 못할 정도로 초보 엄마 역할에 충실했다.

엄마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는 사진을 꽤나 즐겨 찍었다. 예뻐 보이는 나를 중심으로 고르고 골랐다면 엄마가 된 후로는 예뻐 보이는 순간이 중점이 되었다. 아이들 덕분에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 그로 인해 활짝 웃음 짓는 순간, 아이가 모유를 먹고 트림을 하는 순간, 아이가 첫걸음을 떼는 순간, ‘엄마’하고 첫 말을 떼는 순간, 둘째 아이가 태어난 순간, 첫 돌을 맞이한 순간, 어린이집에 씩씩하게 등원하던 순간,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던 순간, 가족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 순간.

남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터졌던 플래시가 이제는 나 스스로가 기억하기 위한 플래시로 바뀌었다. 진정 살아있고 나답게 살고 있는 순간을 타인에게 아무리 열어 보인다 해도 나처럼 알 수 있을까. 매일같이 최선을 다했던 나의 모습도 담고 지금을 잘 살고 있다는 만족감도 담아 보는 게 모두 ‘나’를 기념하는 것 아닐까. 잘 찍어진 사진은 열어 보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 사진첩 속에 담아 두어 추억하는 것도 모두 ‘순간’이다. 아이 사진처럼 꾸준하지는 못하더라도 간혹 나를 찍는 것이 어색하더라도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자신을 찍어 기념해 보자. 언젠가 돌이켜 보면 ‘아, 그 때 참 좋았지, 내 생에 최고의 날이었어’ 추억할 수 있도록. 지금의 내가, 내 생의 가장 젊은 날일 오늘을 기념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오랜만에 셀카 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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