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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공원에서 놀이밥 데이트 하는 중. 애기엄마가 누군고 하니 바로 나였다. 아이와 함께 놀며 그네를 밀던 중에, 모두들 각자의 자리에서 뭐든 한창 열심일 오전 9시 30분 즈음에. 누군가 부를 리 없다는 생각이 당연해 돌아보지 않았다. 한번 더 ‘애기엄마’하는 말에 고개를 돌아보니 나다. 주름이 패이고 거뭇한 기미가 드문드문 있는 딱 봐도 70이 가까워 보이는 남자 어르신이다. 다가오며 손짓하는 모양이 나를 향하니 그제서야 무슨 일인가 싶다.

“아, 저요? 무슨 일이세요?”
“핸드폰에 전화번호 저장을 했는데 위치가 바뀌어서 찾을 수가 없으니 못하겠네, 이것 좀 도와줘 봐요. 이거 위치가 어떻게 달라지게 되나. 내 나이가 아직도 한창 젊은데 이거 원, 이게 들었어도 금방 까먹게 되네.”

순간 키오스크(무인 주문 기계) 앞에서 머뭇대던 나 자신과 겹치면서 어르신의 곤란함이 무언지 알 것만 같다. 분명 익숙하다고 생각했고, 주문이야 기계 앞에서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다고 여겼다. 난 아직 젊은데, 생각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레 어딘가에서 막히면 당황하며 허공에서 멈칫하는 손가락. 주춤 주춤 마치 신문물 마냥 더듬거리다 주문이 겨우 되면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뒤처진 듯한 곤고함이 밀려들던 난감함. 분명히 저번에는 매끄럽게 잘 했는데 오늘은 왜 이랬지 싶은 씁쓸함.

직원이나 사장이 아닌 이상 각 매장마다 메뉴를 다 외우고 있을리 만무하고 사용설명서가 따로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 다 결정하지 못하고 주춤주춤하고 있으면 갑자기 시간이 다 되었다고 초기 화면으로 전환되는 것도 빨리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연결된다. 기계 앞에서 기계 아닌 인간이 느리다고 다그침을 받는 모양새다. 빠름이나 정확도는 단연 로봇이 빠를텐데 인간에게 빨리 정확하게 주문하라는 건 누구를 위해 준비된 기계인가 싶다.

아마도 나에게 질문을 하신 이 어르신도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매일 같이 들고 다니는 기계인 핸드폰이 전화 외에도 다른 기능이 있고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새로운 것 같은 낯설음. 그에 따른 당황스러움. 잘 해내고 싶은 마음. 나이가 들었나 싶은 쓸쓸함. ‘젊은 엄마’하고 불렀을 때 자신은 이제 늙었구나 생각하는 씁쓸함.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최대한 친절하게 어르신과 대화를 나눴다.

‘저도 이럴 때가 있어서 간혹 당황스러워요. 제 기종과 달라서 잘은 모르지만 한번 찾아볼게요. 그래도 어르신 보니까 이게 원인인 듯 한데 잘 찾아내시고 하셨네요.’
최대한 무안하지 않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해결될 때까지, 여러 질문을 받고 답하고 하면서. 해결하고자 하는 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벗이 되어드린다 생각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나도 언젠가는 이 어르신처럼 나이 들어 갈 거고. 그 즈음에라면 세상의 것들이 어려워지는 순간을 만날 수도 있을거다. 그 때 작은 힘이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노력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안심이겠다.  머지 않은 미래에 기계처럼 획일화 되지 않고 패스트푸드처럼 빨리 빨리만 주문되지 않고, 인간의 정이 살아 있는 마음이 따뜻하고 타인과 함께 어우러지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이 지금처럼 그대로 이어져 갔으면 하고 바란다.

키오스크로 주문하기, 매장과 브랜드는 관련없음.

당신은 어느 지점에 있나요?

2021. 8. 7. 07:28 | Posted by Musicpin

쭈뼛쭈뼛하다. 시선은 흔들리고 간혹 ‘음…….’한다. 미세한 떨림이 내 주변의 공기에 와 닿는다. 상대방의 언행이 편치 않다. 그걸 보는 나도 ‘괜히 말을 걸었나’싶다. 말을 건넨다는 게 상대방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은 마음의 출발인데 그마저도 상대방을 어렵게 만든다면 이를 어쩌나.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상대와 곧 마흔을 앞둔 내가 과연 대화가 가능하기는 할까. 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쉬는 시간 짬짬이 책상 나란히 앉게 되는데 어색한 공기 내음은 어찌 할까. 돌이켜 보면 내 나이 스물 즈음에도 그랬지 싶어 공감이 되면서도 그 나이 때 바라봤던 어른 냄새 가득한 여성을 보며 느꼈던 무언의 곤란함이 이제는 나에게도 해당되었음을 느끼게 되니 한편으로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아직 한창인 것 같은데 어느새 내 나이 마흔을 앞둔다. 젊은 아가씨의 좌불안석 어찌할 줄 모르는 행동을 통해 내 나이를 실감한다. 마냥 철부지 어린애 같은 내가 이제는 중반으로 향하는 길을 인식해야 하는 나이가 된 거다. 사회에서 혹은 사람들의 인식이 나를 보았을 때의 반응이 피부에 와 닿는다. 말이 많으면 수다스러운 어른이 되고 말이 없으면 권위적인 어른이 된다. 먼저 인사를 건네면 부담스럽고 젊은 상대가 인사하길 기다리면 꼰대가 된다. 세월의 흐름, 나이의 무게, 중년으로 향하는 이 길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에게 묻는다.

 

중년 여성이라면 이래야지 하는 사회가 정해 놓은 분위기 말고 나답게 나이 들어 간다는 건 어떤 것을 말할까 자문한다. 젊음을 붙잡으면 속도 없이 가볍게 보이고 세월의 흔적 가득한 어른 행세를 하면 그 또한 무겁다. 마음이 젊다 하여 내 삶의 중력을 거스르고 살기엔 체력적인 변화와 심적인 무게감도 분명히 있다. 다이어트 목적의 건강이었다면 이제는 아프지 않고 골고루 건강하게 사는 것이 웰빙의 범주가 되었다. ‘내 아이 일이 있어서’라는 핑계 같았던 말을 뼛 속 깊이 이해하고 대화의 대부분이 ‘육아’에 포인트 되어 있는 지점에서도 나이를 실감한다. 자식 이야기, 살아온 세월, 건강, 삶과 지혜, 신앙, 취미 등등.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는 것들이 주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수많은 여성이 자신을 돌이켜볼 새도 없이 갑작스레 중년의 삶을 인식한다. 아가씨에서 갑작스레 중년 여성으로 변모하는 모양새다. 세월의 흐름이라면 이 곳과 저곳의 흐르는 다리는 분명 존재할텐데 경험담이 많지 않으니 한계가 있다. 감히 그려보자면 자신의 열정을 밖으로 펼치기 보다 육아에 포커스 되어 견뎌야 했던 것 아닐까. 아이 낳고 키우고 가정에서의 화롯불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느라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중년을 맞는 건 아닐까. 기록되지 않으면 역사에 없듯이 살았는데 알지 못하는 지점을 묵묵히 견뎌내었던 건 아닐까.

 

K-뷰티, 아름다움, 외모와 마음 가꿈, 스스로 외적인 자신을 밖으로 뻗쳐 나갈 때의 유능감이 그 때만 가능한건가 자문도 한다. 외모적으로 예뻤으면 좋겠고 마음으로 아름다웠으면 바란다. 신체적으로 매력적이었으면 좋겠고 사고와 인식이 지혜로웠으면 하고 바란다. 미성숙했지만 성숙하기 위해 노력한 젊은 시절을 돌이킨다. 여전히 미래를 꿈꾸고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며 배워야 할 것도 넘쳐난다.  새로운 오늘이 주어졌고 그에 따라 어떤 태도로 살아 가느냐는 늘 묻는다. 나이의 무게에 세월의 흐름에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여전히 여기서 오늘을 사는 내가 있다는 것이 답이 된다면 될까.

답은 스스로 찾아나가는 거야.

2021. 8. 3. 07:01 | Posted by Musicpin

 “엄마, 우리 반에서 00하고 00가 수학을 제일 잘해.”

“나는 잘 못해, 문제 풀고 앞에 나가 검사 받을 때도 늦게 나가는 편이야.”

“수학을 잘 하고 싶니?, 학원을 다녀볼까? 아니면 매일 수학공부를 꾸준히 해 볼까,”

 

초등학교 2학년, 지금은 여름방학.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하고 세 자리 수의 덧뺄셈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 연습이 되고 익숙해져야 풀 수 있는 기본적인 셈을 아이는 매끄럽게 해내고 싶은 거였다. 속으로는 내심 씨익 웃었다. 드디어 공부를 잘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다.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잘 하고 싶을 때가 오면 그 때 공부의 적기이리라 생각을 했었다. 엄마가 심어주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학원을 다니게 하는 것도 아닌, 스스로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해보자고 마음먹는 힘. 그 마음이 일 때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어느새 스스로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 온 거다.

 

학원이 빠른 길이 되어 지름길로 안내해줄 수 있다. 문제를 풀고 답을 맞추고 시행착오 없이 술술 풀리게 연습도 할거다. 물론 알지만 나는 더 먼 것을 봤다. 스스로가 문제를 인식하고 알아차리고 풀어내려고 노력하는 끈기, 끙끙대고 혼자 풀어냈을 때의 성취감과 만족감, 내가 해냈다는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긍심. 그건 학원에서도 세세하게 심어주기 어려운 마음의 작동이다.

 

‘나도 00을 잘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곧 동력이 되어 아이의 삶을 이끌어 줄 거다. 그 모양새가 ‘수학’이지만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만나는 어려움이나 막힘은 이렇게 시도하고 저렇게 접근하면 풀리더라 라는 삶의 지혜이자 행동의 실천 같은 것을 말한다.  자신 스스로가 잘 하고 싶고 해내고 싶다 생각을 하고 마음을 먹었으니 행동은 무던히 할 수 있다. 부모는 그저 살짝 안내만 주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고 나란히 발 맞춰 걸으면 된다. 이래라 저래라 혹은 이렇게 할래, 저렇게 할래 답을 주어선 안 된다. 답은 스스로 찾아나가는 거다. 부모가 알려 주는 게 아니라.

 

문제 풀이를 하루에 몇 장씩 풀어보면 좋겠느냐, 꾸준히 생각하고 연습하다 보면 잘 하게 될 거라고 응원하고 함께 계획을 짰다. 아이는 스스로 몇 장을 풀 수 있겠는지 감안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양을 본인 스스로 생각해 정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도를 계획했으니 미루거나 힘들어 하지 않을 거다. 자신과의 약속과 행동하며 지킬 수 있는 힘도 기르게 되니 이 또한 삶에서 필요한 자세다. 부모로서 옆에서 지켜보며 마음으로 응원하고 발맞춰 걷기를 한다.

 

미리 알려주면 물론 편하기는 하겠지만 편함이 가져다 주는 불편감도 분명히 있다. 나는 아이가 제 속도에 맞춰 커나가길 바란다. 웃자라거나 겉만 번지르 하다거나 쉽게만 자라 쉬 부러지는 연약함이 아니길 바란다.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 제 발걸음에 걷는다면 아이는 자신의 본 모습으로 자기답게 커 나갈 수 있다. 아이가 가진 본연의 생명력과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믿는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하지?

2021. 8. 3. 05:58 | Posted by Musicpin

아이들의 감성은 간혹 생각지 못한 울림을 주는데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엄마, 빗방울이 작은 별이 되어 쏟아지는 것 같아”

“물 위에 작은 별들이 무수히 쏟아져”

 

계곡에서 물놀이하던 중 잠깐 지나가는 가벼운 소나기. 물 위에 물이 만나자 파동이 인다. 여기저기서 파동이 피어난다. 자신이 앉은 튜브 주변으로 작은 동그라미들이 무수히 피워지는 것을 보더니 아이가 뱉은 말이다. 놀다가도 갑자기 툭 하고 뱉은 말에서 감동을 일게 하는 경우가 많다. ‘작은 별들이 쏟아진다’라는 시적인 표현에 우리 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감탄을 했다.          

 

여자아이 남자아이 할 것 없이 아이들은 모두 제각기 시인이자 감수성 천재다. 몸으로 느끼고 놀고 아우르는 아이들에게는 편견이나 판단이 없다. 그저 자연 그대로 흡수한다. 옳고 그르다가 아니라 자연 자체가 곧 삶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 체험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것. 아무런 제약도 없이, 무언가 제한하는 것 없이 무한하고 자유롭다.  

 

아이들에게서 한 수 배운다. 아니, 미래세대에게서 배운다. 어린 애가 어떻게 알지가 아니라 한 수 가르쳐 주니 감사하다는 의견이 더 옳을 것 같다. 어른이 되어 편견에 갇히는 나에게 틀을 깨라는 깨우침을 주는 것 같으니 말이다. 동심은 순수함이다. 순수함은 온전하다. 따뜻하다.

집에서 출발 해 15분 남짓. 계곡에 도착한다. 사람 많지 않고 주차할 곳이 코 앞이고 지금 우리 아이들이 물놀이 할 수 있는 딱 알맞은 깊이의 물이 졸졸 흐른다. 나에게는 발목에서 무릎까지 오는 깊이인데 아이들 챙기면서 자연을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충만하다.

알맞은 곳에 자리를 펴고 물에 발 담그고 앉아 졸졸졸 흐르는 물 소리를 들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사이사이로 지나가는 물고기를 만나고 다슬기가 느리게 이동한다. 다양한 물 속의 곤충들을 보고 잡는다. 어깨 사이를 넘나들며 날아다니는 나비들의 춤사위에 나의 마음도 함께 살랑살랑 바람이 된다. 아이들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니 자연스레 몰입도가 높아진다.

가까운 곳에 자연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마음만 먹으면 늘 갈 수 있으니 의지만 발동하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겉치레 없이, 남의 시선 신경 쓸 필요도 없이 그저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온다. 놀이 가방 어깨에 툭 걸치고 가장 편하게 출발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나답게 열어 보일 수 있는 것, 그 점이 참으로 좋다. 화려하기만을 바라지 않고 허례허식만 채우고 있지 않은 그저 온전히 나다울 수 있는 시간. 그 점에 늘 자연을 찾게 된다.

장난감 배를 물에 띄우며 나란히 걷다가 아이가 말한다.
“엄마, 물길이 빠를 때는 배도 엄청 빠르고 내 걸음과 비슷한 속도로 흘러갈 때도 있고, 떠내려가다 제자리에 멈추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고 막히기도 해. ”
“막히거나 제자리에 머물 때는 어떻게 해?”
“응. 그럴 땐 물이 흐르니까 기다려주면 알아서 제자리 돌다가도 배가 흘러가고, 너무 안 움직일 때는 살짝 방향을 바꿔주면 배가 다시 흘러가.”

순간 멍해진다. 이런 세상의 지혜와 같은 주옥 같은 말을 뱉다니. 어른이 되어서 잊어버렸을까. 인생의 지혜를 아이가 툭 내뱉은 말에 멈칫한다. 내 삶에서 머무를 때, 멈추어야 할 때, 내 걸음과 비슷한 속도로 걸어야 할 때는 언제였었나 되돌아 보기도 하고. 빠른 물길에 순풍 달 듯 항해하던 건 언제였을까 떠올려보기도 한다. 진리라는 건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더니. 갑자기 훅 하고 내뱉은 아이의 언어에 나의 마음은 온통 장사진을 이룬다. 더듬더듬 이 때가 그 때일까 그려보기도 하면서.

배는 알아서 흐른다. 이렇게 저렇게 손 대지 않아도 알아서 묵묵히 흐른다. 나의 배 역시 지금도 앞으로도 자연에 맞긴 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잘 흐르다가도 머무를 때가 있고 잘 걷다가도 막힐 때가 있을 거다. 그럴 땐 기다리거나 방향만 살짝 틀어주면 배는 알아서 자연스레 계속 흐른다. 조급하지도 빠르지도 않게 나의 속도로. 나의 걸음걸이로 걷는다.


세상에, 나보고 작가라고 했다.

2021. 7. 24. 07:49 | Posted by Musicpin

동공이 커졌다. 놀란 눈썹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벌어진 입을 감싸게 했다. 멍하게 초점 없이 되뇌이다 순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커다란 비밀처럼 꼭꼭 쥐었다. 믿기지가 않는다. 쉽게 알려주기 싫은 꿀단지처럼 달디 달았다. 심장이 두근대고 벅찬 감정이 흘러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릴 때면 슬며시 내 손안의 보석처럼 열었다. 흰 바탕에 검은색 글씨를 보았음에도 내 시선에는 천연의 온갖 무지개 색이 온통 들어가 있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중한 글 기대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세상에나. 나보고 작가라고 그랬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나보고 작가라니. 예전에 『마더코칭 연구소』 수업에서 읽고 썼던 은유작가님의 글이 생각났다. ‘여류 작가’도 아니면서 감히 읽고 쓰는 나는, 여기 사람 있다는 외침이었다고. 느끼고 꿈꾸고 회의하는 감수성 주체로 살아가는 여자 인간이며 나를 설명할 말들을 찾고 싶고 나를 이해할 언어를 갖고 싶었다고.

결혼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한 사람의 아내로 살면서 나의 이름이 흐려질 때, 여기도 사람 있다고 소리 없는 외침을 쏟아 부었다. 여자인간으로서의 삶보다 아이들의 자양분 신랑의 그림자 역을 맡고 있는 듯한 삶을 살 때, 내가 나 자신이면서도 정작 나를 위해 살지 못하는 시간들이 허무했다. 사회적 무능 상태, 모호하고 광범위한 나의 삶에 질서를 주고 싶었다. 나로서 살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로 채워가고 있는 시간들이기도 했다. 그 살아있는 역사가 글 쓰는 과정 중에 기록되고 확인하면서 비로소 내 삶을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찬란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서툴지만 호기심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지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관련된 과를 나오거나 전문가들만이 글을 쓰는 것이라 생각했다. 창의력이 넘쳐나고 글 솜씨가 뛰어난 사람의 전유물이라 생각해 감히 엄두도 내지 않았다. 무엇을 적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고 무작정 썼다. 타인의 누군가에 의해 표현되어지기보다 나만의 언어로 나를 풀어내고 싶다 생각했다. 내가 겪고 느끼는 모든 것들. 즉, 살면서 맞닥뜨리는 문제들, 고민들, 깨우침, 질문, 변화, 희로애락 등 일상의 모든 것들을 나만의 생각과 표현으로 풀어내고 싶어졌다. 그렇게 좀 더 깊고 넓은 생각을 가진 내가 되어가는 과정의 기록이 글쓰기에 있다는 것이 좋다.

혼자서는 감히 바라지 못했을 꿈, 혼자 했다면 감히 용기내지 못했을 목표가 글쓰기 스승님과 글벗 언니가 있어서 가능했다. 일기처럼 쓰는 글도 시간을 내어 읽어주고 일상의 소소함을 그러모아 글감이 될 수 있겠다는 응원도 감사하다. 동굴로 숨어 들어가는 나에게 할 수 있다 지지해 주고 따뜻한 온기와 언어로 할 수 있다는 격려도 감사하다. 그간의 시간들, 길었다면 길고 짧았다면 짧은 이 시간을 함께 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걸, 안다.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내 생에 수를 곱게 놓아주는 두 분이다.

글로 만날 거라는 다독거림과 믿음이 징검다리처럼 엮인다. 혼자만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바람처럼 알려준 힌트 덕분이었고 잘 차려주신 따끈한 밥상 덕분이라는 걸 안다. 매 달 금 같은 귀한 도서들로 생각의 힘을 키워준 선생님께도 감사 하고, 고민하고 부대낄 때 세상 따뜻한 말로 조언해준 언니께도 감사하다. 부족한 글을 나누는 순간에 언니의 메시지(댓글)과 박수로 힘입어 함께 나아올 수 있었다. 우리 모두의 정신이자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도 함께 꿈꿀 수 있음을 믿는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 삶이자 일상을 온 몸으로 살아낸 내가, 중간지점처럼 혹은 간디의 마리츠버그 역처럼 다시금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감사하다.

브런치작가가 되다

아이를 키우는데 완벽이라는 말이나 가당키나 할까. 이건 예술을 정의할 때 어떠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예술은 아름답다는 말을 넘어서지만 육아는 처절하다는 말을 넘어서는 무언가다. 살아있음이고 현재에 존재하는 거고 매일이 체력전이다.

명상이 필요하시거나 수행이 필요하신 분들에게 육아를 권한다. 한바탕 뒹굴고 나면 혼자만의 시간이 얼마나 달콤한지 한 줌의 잠이 얼마나 맛있는지 절로 깨닫는다. 누군가에게는 육아가 호강일지 모르나 사람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배우는 것도 육아다. 나의 숨쉬는 것까지 닮을 아이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지고자 무던히 노력하는 점에는 수행이 따로 없다.

좋은 습관을 장착하고 마음에 영양분을 줄 긍정적 마인드로 세상을 보며 뒤따라 오는 아이들의 삶에 좋은 것만 되물림해주고자 뼈를 깎는 고통으로 자신을 들여다본다. 리모컨이 냉장고 안에 있다거나, 갑자기 주제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그거 뭐지? 왜, 그거 있잖아. 폐경이 다가오면 겪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라고 풀어서 이야기할지라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해나갈 수 있는 힘에는 당연코 ‘엄마’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뛰어넘는 불굴의 의지랄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속삭일 수 있는 건 아마도 ‘엄마’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도 ‘엄마’라면 온전히 믿고 의지하고 오롯이 사랑해주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을 들여다 보면 나는 누군가에게 이토록 소중한 적이 있었을까 절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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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으로 사용하는 감각통합실, 음악실로 가기 위해 아이의 손을 잡고 지나간다. 안부도 묻고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말도 건네고. 대답이 없을 아이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런두런 말을 건넨다. 음악치료실로 가려는 목적이 분명한 나에 반해 아이는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며 어기적어기적 걷는다. 그러다 문득, 한 켠에 놓인 비누방울 스틱을 아이는 갑작스레 빼앗듯 집어 들었다.

‘이건 우리 시간에 하는 게 아냐, 우린 음악실로 가자. 그리고 이건 물건 주인에게 사용해도 되느냐 물어보고 난 후 괜찮다고 하면 그 때 사용하자.’

가지고 놀고 싶었던 마음이 원하는 방향으로 되지 않자 아이는 그대로 주저 앉았다. 초등학교 3학년 남자 아이. 나의 어깨까지 키가 크고 끌어당기는 힘이 내가 흔들릴 만큼 센 아이. 한번 주저앉자 더 이상 끌어지지가 않는다. 몇 번을 가져갔다 빼앗아왔다 반복하자 급기야 아이는 목청껏 울기 시작했다.

‘하고 싶어요. 그거 주세요. 당장 내놓으라고요’ 하듯 아이는 자신의 온 힘으로 버티고 실내가 다 울리도록 운다. 원하는 것을 갖고야 말겠다는 고집과 우리 물건이 아니니 그럴 수 없겠다는 의견이 맞섰다. 하고자 하는 바람이 다른 우리는 그 자리에서 팽팽하게 대립했다. 원하는 목적이 ‘비누방울 놀이’와 ‘음악실로의 이동’으로 다를 때 치료사로서 나는 어떤 자세와 태도를 취해야 할까.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아직 말도 안 하는 아이. 울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아이. 본능적인 욕구만이강한 아이. 이쯤 되면 다양한 의견이 내 안에서 분출된다. ‘그냥 쥐어줄걸 그랬나. 아니야, 그래도 알려줄 건 알려줘야지. 그래도 저렇게까지 울면서 하고 싶다고 하는데……. 아니야. 아이가 진정 바르게 자랄 수 있으려면 자신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힘도 길러주는 게 나의 몫이야.’

결국, 아이는 비누방울 놀이도 못하고 나는 음악실로 이동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둘 다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힘겨루기를 했다. 알려주려는 자와 알고 싶지 않다는 자 사이의 긴장감이 우리 사이에 놓였다. 기본적인 태도가 될 중요한 습관을 형성하는 과정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행동은 단호했지만 마음으론 함께 울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아이와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를 만난다는 건, 우주를 만나는 일이다. 내 아이가 귀하듯 이 아이도 귀하다. 나의 기준이 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회에서 적응해 살아가려면 기초적인 규범은 알고 자신을 스스로 조절하고 내 물건이 아니라면 내려놓을 수 있는 통제력도 있어야 한다. 자리에 앉아 혼신의 힘을 다해 우는 아이 옆에 가만히 앉았다.

이젠 바닥에 누워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겠다 귀를 닫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건 등을 쓸어 내리는 행동만이 유일했다. 비록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는 못하지만 이 순간에는 함께 하고 있다 알려주고 싶었다. 울음을 그치고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나는 여기 있겠노라 아이에게 온 마음을 다해 전해주고 있는 행동이기도 했다. 단호하지만 혼자 두지 않겠다는 진심으로 아이의 공간에 함께 머물고자 했다. 눈물에 가려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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