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걷는 사람, 쓰는 사람, 하는 사람-*
Musicpin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세상에, 나보고 작가라고 했다.

2021. 7. 24. 07:49 | Posted by Musicpin

동공이 커졌다. 놀란 눈썹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벌어진 입을 감싸게 했다. 멍하게 초점 없이 되뇌이다 순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커다란 비밀처럼 꼭꼭 쥐었다. 믿기지가 않는다. 쉽게 알려주기 싫은 꿀단지처럼 달디 달았다. 심장이 두근대고 벅찬 감정이 흘러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릴 때면 슬며시 내 손안의 보석처럼 열었다. 흰 바탕에 검은색 글씨를 보았음에도 내 시선에는 천연의 온갖 무지개 색이 온통 들어가 있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중한 글 기대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세상에나. 나보고 작가라고 그랬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나보고 작가라니. 예전에 『마더코칭 연구소』 수업에서 읽고 썼던 은유작가님의 글이 생각났다. ‘여류 작가’도 아니면서 감히 읽고 쓰는 나는, 여기 사람 있다는 외침이었다고. 느끼고 꿈꾸고 회의하는 감수성 주체로 살아가는 여자 인간이며 나를 설명할 말들을 찾고 싶고 나를 이해할 언어를 갖고 싶었다고.

결혼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한 사람의 아내로 살면서 나의 이름이 흐려질 때, 여기도 사람 있다고 소리 없는 외침을 쏟아 부었다. 여자인간으로서의 삶보다 아이들의 자양분 신랑의 그림자 역을 맡고 있는 듯한 삶을 살 때, 내가 나 자신이면서도 정작 나를 위해 살지 못하는 시간들이 허무했다. 사회적 무능 상태, 모호하고 광범위한 나의 삶에 질서를 주고 싶었다. 나로서 살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로 채워가고 있는 시간들이기도 했다. 그 살아있는 역사가 글 쓰는 과정 중에 기록되고 확인하면서 비로소 내 삶을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찬란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서툴지만 호기심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지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관련된 과를 나오거나 전문가들만이 글을 쓰는 것이라 생각했다. 창의력이 넘쳐나고 글 솜씨가 뛰어난 사람의 전유물이라 생각해 감히 엄두도 내지 않았다. 무엇을 적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고 무작정 썼다. 타인의 누군가에 의해 표현되어지기보다 나만의 언어로 나를 풀어내고 싶다 생각했다. 내가 겪고 느끼는 모든 것들. 즉, 살면서 맞닥뜨리는 문제들, 고민들, 깨우침, 질문, 변화, 희로애락 등 일상의 모든 것들을 나만의 생각과 표현으로 풀어내고 싶어졌다. 그렇게 좀 더 깊고 넓은 생각을 가진 내가 되어가는 과정의 기록이 글쓰기에 있다는 것이 좋다.

혼자서는 감히 바라지 못했을 꿈, 혼자 했다면 감히 용기내지 못했을 목표가 글쓰기 스승님과 글벗 언니가 있어서 가능했다. 일기처럼 쓰는 글도 시간을 내어 읽어주고 일상의 소소함을 그러모아 글감이 될 수 있겠다는 응원도 감사하다. 동굴로 숨어 들어가는 나에게 할 수 있다 지지해 주고 따뜻한 온기와 언어로 할 수 있다는 격려도 감사하다. 그간의 시간들, 길었다면 길고 짧았다면 짧은 이 시간을 함께 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걸, 안다.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내 생에 수를 곱게 놓아주는 두 분이다.

글로 만날 거라는 다독거림과 믿음이 징검다리처럼 엮인다. 혼자만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바람처럼 알려준 힌트 덕분이었고 잘 차려주신 따끈한 밥상 덕분이라는 걸 안다. 매 달 금 같은 귀한 도서들로 생각의 힘을 키워준 선생님께도 감사 하고, 고민하고 부대낄 때 세상 따뜻한 말로 조언해준 언니께도 감사하다. 부족한 글을 나누는 순간에 언니의 메시지(댓글)과 박수로 힘입어 함께 나아올 수 있었다. 우리 모두의 정신이자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도 함께 꿈꿀 수 있음을 믿는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 삶이자 일상을 온 몸으로 살아낸 내가, 중간지점처럼 혹은 간디의 마리츠버그 역처럼 다시금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감사하다.

브런치작가가 되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만 서른여덟의 나를 기념한다. 아가씨 적에 그리했던 것처럼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고 얼굴 근육에 별다른 변화가 없음에도 예쁜 척 한껏 표정을 지어본다. 모처럼 찍어보는 나의 표정과 얼굴이 어색하면서도 이내 마음을 가다듬는다. 지금 찍지 않으면 언제 또 찍어볼까. 기억하고 싶은 순간, 추억에 남기고 싶은 순간, 지금 나의 상황이 가장 아름답다 느껴지는 순간. 이 순간순간들이 구슬처럼 꿰어져 내 삶이 될 텐데 찍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아이에게 온통 플래시가 켜졌다. 꼼지락거리며 세상 전부인 양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좋아서, 지금 아니면 못 찍을 것 같아서, 아이와 함께 보내는 일상이 너무나 소중해서 늘 아이에게 핸드폰을 들이댔다. 그러다 보니 예쁜 척 하는 게 재미없기도 했고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더 반짝이는 아이가 옆에 있는데 오밀조밀한 아이를 찍는 맛에 나를 찍을 생각은 안 했다. 혹은 늘어진 흰 티나 불어난 부피의 무언가가 내심 사진에는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모든 부분의 곳곳이 나 인데도 못나 보이는 모습은 카메라에 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좋아 보이는 것만 나일까, 반짝반짝 할 때만 나 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줄근하고 늘어져 보이는 건 내가 아닌 걸까.남들 보기에 평범한 주부의 모습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 질문했다. 내 삶에서 유일하게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보는 순간들이 보람되고 값진 것이라면 과연 이 순간만큼 더 빛나는 순간이 있을까. 외모가 변한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변한 게 아닐 텐데 엄마라는 역할을 맞이한 순간부터 ‘나’가 동떨어졌다. 돌보지 못하고 지쳐 잠들던 찰나의 순간들에 나동그라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아이가 까꿍이 시절에는 나 자신을 찍어보자는 생각도 감히 못할 정도로 초보 엄마 역할에 충실했다.

엄마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는 사진을 꽤나 즐겨 찍었다. 예뻐 보이는 나를 중심으로 고르고 골랐다면 엄마가 된 후로는 예뻐 보이는 순간이 중점이 되었다. 아이들 덕분에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 그로 인해 활짝 웃음 짓는 순간, 아이가 모유를 먹고 트림을 하는 순간, 아이가 첫걸음을 떼는 순간, ‘엄마’하고 첫 말을 떼는 순간, 둘째 아이가 태어난 순간, 첫 돌을 맞이한 순간, 어린이집에 씩씩하게 등원하던 순간,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던 순간, 가족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 순간.

남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터졌던 플래시가 이제는 나 스스로가 기억하기 위한 플래시로 바뀌었다. 진정 살아있고 나답게 살고 있는 순간을 타인에게 아무리 열어 보인다 해도 나처럼 알 수 있을까. 매일같이 최선을 다했던 나의 모습도 담고 지금을 잘 살고 있다는 만족감도 담아 보는 게 모두 ‘나’를 기념하는 것 아닐까. 잘 찍어진 사진은 열어 보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 사진첩 속에 담아 두어 추억하는 것도 모두 ‘순간’이다. 아이 사진처럼 꾸준하지는 못하더라도 간혹 나를 찍는 것이 어색하더라도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자신을 찍어 기념해 보자. 언젠가 돌이켜 보면 ‘아, 그 때 참 좋았지, 내 생에 최고의 날이었어’ 추억할 수 있도록. 지금의 내가, 내 생의 가장 젊은 날일 오늘을 기념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오랜만에 셀카 찍기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나에게 공간이란

2021. 4. 21. 13:01 | Posted by Musicpin

엄마의 자리 그리고 엄마가 된 나의 공간에 대하여

“자기만의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은 자기 만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의미다”

 

아이들 방, 안방, 티비방(컴퓨터,프린터기), 거실. 현재 사는 아파트에는 방이 3개, 주방과 연결된 거실, 욕실이 두 개, 세탁실 포함한 베란다와 빨래를 널어놓은 베란다.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베란다가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라야 아이들 방은 놀이방이었고 안방에서 같이 잤으며 티비방은 크게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때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으나 아이들이 커갈수록 공간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의 공간도 함께 말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옷이 수북이 쌓인 어느 한 구석에 테이블을 놓고 노트북이 올려져 있었다. 아이들이 잘 때 언제든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공간. 어느 정도 컸을 땐 주방 한 구석에 엄마의 자리를 마련해 다이어리와 노트북, 책들을 올려놨었다.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삶을 사유하고 감응하는, 최소한의 나를 유지할 수 있는 보장된 공간을 확보한다는 의미다. 이사를 다니면서 혹은 어느 방에서든, 거실에서든 한쪽 구석에 자리하면 나만의 장소가 되고는 했다. 내가 나를 만나는 유일한 장소. 그것이 어느 구석이든 마련되는 테이블 위라고만 생각했다.

 

주방이 전적으로 엄마의 공간이 된다는 의견을 깬다. 주방은 우리 모두의 공동 공간이며 밥은 엄마 혼자 하지 않는다. 밥은 아빠도 할 수 있고 엄마도 할 수 있으며 쌀은 남매가 모두 씻을 수 있다. 요리는 엄마 혼자의 전유물이 아닌 온 가족이 함께 한다. 거실도 마찬가지다. 북카페처럼 인테리어를 고수하는 데는 거실에 자리한 테이블에서 가족이 함께 책도 읽고 과제도 하고 온라인 수업도 함께 한다. 공유의 자리가 되기도 하고 혼자만의 넓은 책상이 되어주기도 한다. 식탁이 되었다가 카페 테이블이 되기도 한다.

 

내가 나로서 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빈 공간에만 악착같이 고수하던 의견을 내려놨다. 주방이 나만의 전유물이 아니듯, 거실이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 듯 말이다. 나만의 공간이라고 아끼고 아껴 마련해 놓으면 금새 남매의 아지트가 되고, 엄마만의 장소가 꼭 비밀스런 무언가를 감춰놓는 것만 같아 보물찾기 하듯 꿰차는 남매를 보면서 나만의 장소는 공간에만 의미 둘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고요한 성소는 사실 공간에만 국한될게 아니라 언제든 혼자서 조용히 시공간을확보 할 수 있는 시간이 동반되어야 했다. 아이들이 모두 잠이 든 밤에도 시도해보고 등원 후 오전 시간도 시도해봤지만 나에게 가장 만족도가 높은 시간대는 새벽이었다. 밤에는 아이들이 잠을 자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고 오전에는 이런저런 일상으로 변수가 많았다. 오직 새벽만이 오롯이 혼자였다.

 

새벽 기상으로 홀로 되는 시간을 만들어야 나만의 공간이 가능하고 시간을 확보한다. 지금에는 공간에서라기 보다 우선 순위에 따른 시간 확보가 먼저 된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시간에 일어나 나만의 일정을 소화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건 깊은 만족감보다도 더 진한 무언가다. 컴퓨터가 놓인 티비방에 나만의 테이블을 놓고 시각적으로는 두지만 무조건 나의 장소이니 침범하지 말라 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언제든 털썩 앉아서 집중하고 접어두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확보되면 그곳이 주방 한 구석이든 거실 한 가운데이든 티비방 테이블이든 다 좋았다.

 

새벽기상을 한 날과 못 한 날의 차이는 뭐랄까. 감정과 집중의 밀도가 촘촘하다 못해 견고한 느낌. 응집되고 응축되어 고도의 진하디 진한 엑기스 같다. 푸드덕 사라질 날갯짓이 아니라 더 멀리 닿기 위한 도약의 도움닫기. 이상으로의 도약, 하루의 시작에 힘찬 첫 발걸음이 되어준다. 새벽기상을 한 날과 아닌 날의 몸 상태는 O, X의 기로지만 컨디션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다르다. 안정감과 중심이 잡힌 상태로 하루를 시작하는 깊은 내면의 상태가 지속된다. 만족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나에게 공간이란 새벽이다.


사랑정원네 주말농장, 텃밭 열다.

2021. 4. 12. 12:04 | Posted by Musicpin

모종을 보러 다녔다. 적상추, 깻잎 등은 이미 심겨져 있었기에 오크 상추, 청치커리 등을 심었다. 5월이 되면 방울토마토와 오이, 고추도 심어볼 거라고 우리 집 아이들은 종알댄다. 주말농장을 예약하고 난 후 우리 가족은 설레었다. 한편으론 놀랍기도 하고.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내가 엄마가 되고선 감히 해 볼 용기를 내었으니 얼마나 새로운가. 나에게도 새로울 도전이, 혼자서는 생각하지도 않았을 도전이 엄마라는 이름으로는 부딪힐 용기가 되어준다.

 

어렸을 적 주택에 살았던 나는 집 옆의 텃밭에서 놀곤 했다. 부추와 상추, 열무, 가지, 오이 등이 열리면 엄마는 그 자리에서 가지를 따서 먹어보라고 건네고는 했다. 바구니 한 가득 푸짐하게 담긴 채소들은 깨끗하게 씻어 점심 밥상에 올랐다. 텃밭 옆 작은 평상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먹는 점심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갓 따내어 낸 채소가 싱그럽고 달다는 건 그 때 알았다. 지금도 간혹 그 때의 쌈 채소 맛이 떠오르는 걸 보면 어렸을 적 추억이 삶의 자양분이 된다는 뻔한 이야기가 생생해 진다.

 

생기 있고 살아있는 채소의 맛을 아이들에게도 알려줄 수 있다니 즐겁지 않을 수 있나. 어쩌면 어릴 적 한 자락에 자리한 그 추억 덕분에 과감히 용기 내어 텃밭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에게도 직접 심어보고 키우고 수확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렸을 때는 아무 생각 없었던 텃밭이 이 나이 되어서 아이들과 함께 하게 된다니 건강한 먹거리에 대해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행동하는 교육이 실천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상당히 고무적이다. 상추나 깻잎은 잘 자란다니 두려움이나 걱정은 내려놓고 푸릇하게 싱싱한 채소들을 만날 날을 그려봐야지.

 

초보 엄마의 조심스런 마음은 안중에도 없듯 아이들은 모종삽 하나씩 들고 열심들이다. 9세의 딸 아이는 집에서 분갈이를 종종 해 본 터라 텃밭에 심을 때도 적극적이다. 비닐이 덮어진 곳에 모종삽으로 파내어 포트에서 빼낸 모종을 옮긴다. 모종을 옮긴 후 주변 흙으로 모종과 텃밭 사이의 공간을 채워 넣은 후 살포시 눌러주며 뿌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한다. 한 손 가득 모아진 주먹에 흙이 가득 담기다 모종의 뿌리에 내려놓으며 덮는다. 고사리 손으로 하나하나 심어나가는 손이 야무져 보인다.

 

둘째 아들은 모종을 옮겨 심는 게 생소한지 삽을 들고 연신 여기 저기 땅을 파 놓는다. 흙을 만지고 풀을 파다가 작은 새끼 지렁이를 만나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지렁이를 만지기도 하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 보기도 한다. ‘엄마, 이거 좀 봐봐’하며 깔깔대는 게 생기가 돈다. ‘뭔 지독한 냄새가 나(비료냄새)’ 하기도 하고, 돌을 파내어 보기도 하는 등 분주하다. 집에서는 ‘엄마, 심심해’ 말을 쏟아내는데 한창인 아이가 여기저기 다니는 모습이 너무나 반갑다. 혼자서 자연을 만끽하도록 슬그머니 내버려둔다. 잠시 혼자 두어도 지척에 가족이 있으니 한 마음으로 엮인다.

 

아이가 어릴 때는 ‘나 같으면 내 체력에 저렇게 못할 거야’ 외쳤던 책의 한 구절이 현실이 된 나를 보면서 우리 아이들이 벌써 이만큼 큰 거구나 실감한다.

엄마라서 참 다행이야 中. 96p. 구멍난 바지와 그을은 얼굴

“아이를 그을리게 하라.

풀, 흙, 벌레를 만지게 하라.

더러운 옷을 입게 하라. 옷이 더러워지게 하라.

기게 하라. 구르게 하라. 뛰게 하라.

적당히 긁히거나 까져도 된다.

더 좋다.

회복되는 과정은 성숙과 인내를 배우게 하니” –오소희 글.


'그리고,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러니 그대, 멈춰서지 말아라  (0) 2021.05.21
나에게 공간이란  (0) 2021.04.21
코로나19가 다시 늘어난다.  (0) 2021.04.05
미라클 모닝, 자가점검  (0) 2021.03.12
내가 너에게  (0) 2021.03.08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