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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처럼 걷는 법

2021. 12. 14. 07:23 | Posted by Musicpin

나에게 걷기란, 새삼스러움이었다. 굳이 집에 다시 돌아올 거 왜 신발을 신고 나가야 할까 싶은, 혹은 목적 없이 이리저리 걷는 게 무슨 이득일까의 범주였다. 할일 없이 그냥 서성인다의 인식이 어쩌면 내가 가졌던 걷기에 대한 인식이다. 아마 최초로 운동의 필요성에 의해 걸었던 지점은 첫째 아이 임신하고 나서인 것 같다. 임신 6개월을 넘어서며 배가 슬슬 나오기 시작할 때, 8개월이 지나면서는 안전한? 출산을 위해 트랙을 걸었다. 순산을 위해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고 많이 걸을수록 좋다는 말이 나를 움직이게 한 것 같다. 어쩌면 출산의 공포와 아픔을 좀 완화해 보고자 스스로 움직였던 최초의 경험이지 싶다.

 

82p. 태초에는 발이 있었다. … 본질적으로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다. 우리는 혼자서, 자기 자신을 위해 걷는다. 자유는 걷기의 본질이다.

88p. 이제 우리는 루소가 왜 걸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걷는 데에는 인류 문명의 인위적 요소가 전혀 필요치 않다. 가축도, 사륜마차도, 길도 필요 없다. 산책자는 자유롭고,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다. 순수한 자기 사랑이다.

 

자유와 자기사랑이라……. 나를 끔찍이 ‘생각’하기는 하지만 숨쉬듯 나를 사랑한다고 ‘느낀’ 적이 있었던가. 자신을 보살피고 돌보고 건강을 관리한다는 측면에서의 자기 사랑은……. 생소하다.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혹은 “철학보다 몸에 더 많은 지혜가 있다” 등의 문구는 나에게 신선함이자 새삼스러움으로 다가온다. 몸이 익히는 것은 잊혀지지 않는 체험적 경험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뚜렷한 동기가 없으면 걸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내가 몸이 체험하며 체득한다는 문장에 공감이 되는 나이가 되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는 루소의 말에 같은 움직임이나 달라진 내면의 이미지가 겹친다. ‘아무 목적 없이 걷는 것’. ‘그냥 무조건 걷는 것’ 의 의미는 순간에 머무르고 채우고 비운다는 지혜를 가까이 하게 한다.

 

올 해 가장 커다란 일상의 리모델링은 단연 걷기다. 어느 날 문득, 가만히 앉아서 책을 들여다 보는 나에게 시작된 변화로 걷기 시작했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 혹은 건강에 좋다니까. 마코 모임에서 걷기의 이점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가만 보니 운이 좋게도 아파트 단지 후문을 벗어나면 바로 자전거 도로이자 산책로가 나온다. ‘마음 먹기’만 한다면 곧장 걸을 수 있을 터였다. 해서 그냥 훌쩍. 걸었다. 처음엔 15분, 20분. 그러다가 40분, 50분을 걸었다. 더해서 남편과 함께 걸을 때면 1시간이 훌쩍 넘게 걷기도 했다. 걸을수록 만족감이 높아지는 경이로운 경험을 몸소 체험하고 나서야 ‘이런 거였구나’체감한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족감과 무언의 감동감이다.

 

무조건 빨리 걷는 것이 아니다. 목적에 닿기만 하는 지점이 아니다. 걸을 때 쿵쾅대는 심장의 느낌, 내 발에 느껴지는 감각, 뻗고 접을 때의 신체 움직임, 앞 뒤로 휘젓거나 좌우로 뻗을 때 팔의 적당한 긴장감, 아무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담고 비우며 담고 비우는 단순한 반복. 희한하게 목적 없이 걷는 반복되는 움직임이 감정에는 충만감으로 밀려온다.

 

100p. 유대교 신학자 아브라함 헤셸은 유대교의 안식일을 “시간 속의 성전”이라고 표현했다. 걷기는 움직임 속의 성전이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느껴지는 평화가 우리에게 달라붙어 함께 움직인다. 휴대 가능한 평온함이다.

 

몸짓Motion이 감정Emotion을 만든다고 했던가. 움직임이 가져다 주는 충만감이자 안정감, 혹은 평온함이 어쩌면 저자가 표현했듯 움직임 속의 성전 아닐까 고개를 끄덕인다. 걸음을 걷는 날과 아닌 날의 차이는 머리가 아닌 몸이 느낀다. 심장이 알아챈다. 그리고는 걷기 안에 깃든 지혜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그래,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거지, 뭐. 하루가 모여 일년이 되고 삶이 되듯이 시작은 한 걸음씩 내딛는 걸 거야. 어떤 길을 걷더라도 나는 그냥 이렇게 묵묵히 걸어야겠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적당하게, 꾸준히, 한 걸음씩.’ 나의 속도에 발 맞춰 걷는 것. 내 인생의 속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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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빈 자리

2021. 10. 20.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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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2021. 10. 5. 06:53 | Posted by Musicpin

신이 아닌 이상 사람이라면 모두 나이가 든다. 나도 늙어갈거고 언젠가는 예상치 못한 질병으로 나의 몸을 인식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피하려 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반갑지만도 않은 시간이 점차 다가온다. ‘노년의 나’는 그때(나이듦)이기에 겪을지도 모를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의 추천서라고 할 수 있겠다.

 

사고가 이끄는 길, 느낌이 흐르는 길의 토대가 되는 몸과 몸에 흐르는 시간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늙고 아프면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 나이듦의 과정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직면해야 할 때다.

 

세 시의 몸들이라. 몸이라 할 때면 처음으로 나의 몸을 진지하게 인식했던 때가 떠오른다. 간염으로 입원했던 일주일의 짧은 시간. 매만져도 통증이 가시지 않았던 그 때. 병실 왼쪽 벽에는 손바닥만한 시계가 걸려 있었다. 손쓰지 못하는 통증에 속절없이, 어서 시간만 흐르기를 간절히 바라던 눈길이 머무는 지점. 시계 안 초침과 분침이다. 새벽임에도 병실 밖은 분주하고 간병하는 남편은 간이 침대에서 쪽잠을 잘 때. 깨우기 미안해 고스란히 아픔을 홀로 감당할 때 통증보다도 마음의 외로움이 스스로를 더 적막하게 했던 것 같다.

 

‘새벽 세 시’ 첫 이미지는 누구나 자는 시간에 깨어 있을 누군가이고, 그러자면 홀로 깨어나 버티는 시간인데, ‘몸들에게’라니, 그 안에서 엎치락 뒤치락 관계성이 피어난다면 그건 무슨 색을 띌까 싶었다. 모르긴 몰라도 함께 있음에도 각각 주어진 역할에 홀로 버티는 시간을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라 표현한 건 아닐까. 함께 함에도 혼자 라는 쓸쓸함이 비치는 제목이다.

 

질병, 고통, 아픔에는 나이가 없다. 아주 어린, 심지어 태내에서도 아픈 아이들부터 나이가 들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짙은 어두움의 그림자는 가깝게 서려있다. 다만 인식하지 못하거나 안 할 뿐. ‘생애문화연구소(기획)’이라더니 나이/듦, 질병, 노년, 세대, 시간, 죽음을 인간의 생애시기마다 ‘문제화’하고 ‘의제화’하려는 노력이 목차에 담겼다.

 

‘돌보고 돌봄 받는 것’에 시선을 붙들고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의 자리, 환자가 만나는 통증과 고통을 책에서 근거와 위로를 찾고, 젊은 아픔에서부터 치매까지 인간의 생애 여기저기서 아픈 소리를 낸다는 것을 생애 별로 정리해 놓은 듯 하다. 젊어서 아픈 것도 서럽고 늙은이 치매 걸린 취급도 언짢다. 나이/듦, 질병, 노년, 세대, 시간, 죽음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듯이 목차에서도 여기저기 시간을 노니는 몸들의 인생을 담은 것 같다.  

 

 


 사람의 몸, 신체를 표현할 때 보통 질그릇, 찰흙과 같은 단어에 담곤 하는데 이 책의 표지가 마침 그것을 내포하는 듯 하다. 몸뚱이, 마음을 담는 그릇 등. 찰흙의 질감에 표현된 신체가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혹은 서로 기대고 혹은 무릎을 꿇었다. 함께 하는 듯 하지만 누군가는 들여다보는 듯 하고 좌절감이 그려지지만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형태가 무게감을 더하고 어떤 마음의 상태, 정신의 에너지가 자유롭지 못해 이고 지는 듯한 묵직함이 느껴진다.지금 아픈 이들,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이들, 나이 들어가며 혹은 나이 들어가는 가까운 이를 보며 불안하고 겁나는 이들, 자신이 지나온 악몽 같은 시간을 삶의 일부로 끌어안으려 애쓰는 이들에게 이 책이 약상자였으면 한다. … 또한 이 책이 공구상자였으면 한다. 사람들이 좀 더 ‘쉽게’아프고 늙을 수 있는 사회, 정의로우며 심지어 기쁜 돌봄이 있는 사회라는 이상을 현실로 당겨오는 데 쓰일 도구를 담고 있었으면 한다. 우리를 낫게 할 말, 동시에 사회를 부수고 다시 지을 말을 만들고 싶다는 터무니없이 큰 욕심에서 조금이라도 선한 것이 탄생했길 간절히 바란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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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좀 초대해줄래

2021. 9. 1. 11:10 | Posted by Musicpin


늘 아이는 양 손으로 귀를 막고 ‘아-‘ 를 끊임없이 했다. 인사를 건네도 ‘아-‘, 환영하는 노래를 부르는데도 ‘아-,‘ 악기 연주 해보자 손 내밀어도 못 들은 것처럼 ‘아-‘. 음악치료 시간에는 음악이 필수인데 아이는 음악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과의 소통을 아이는 원하지 않았다.

아이의 양육자는 음악과 좀 친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 뭐라도 관심을 보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음악치료 시간을 신청한다고 했다. 어렸을 적에 경험한 음악치료니까 뭐라도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신 듯 했다.

말씀대로, 아이는 음악 뿐만 아니라 나와의 소통도 쉽지 않았다. 치료실에 들어오는 것부터가 원만하지 않았는데 버튼 누르기가 더 재밌어서다. 엘리베이터 버튼, 자동문을 여는 버튼. 부드럽지만 분명하고 단호하게 제지하고 음악실로 들어가면 아이는 자신의 두 다리로 서서 교실을 빙글빙글 돈다. 그게 더 재밌다는 듯이. 당신과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면서.

자신만의 세계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아이.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회적 동물이라 타인과의 소통은 본능적이다. 먼저 다가가거나 아니면 관심을 보인다거나. 나 역시 타인과 이야기하고 눈 마주치고 함께 나누는 소통에서 따뜻함을 느끼기도 한다. 헌데 이 아이는 그마저도 원치 않다 하니 어찌하면 좋을까. 그냥 그대로 두자면 아이는 영영 혼자서 자신의 세계에만 있을 것 같아 일단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다. 음악치료사가 음악 없이 한다니 맥락이 맞지 않을수도 있으나 소통이 먼저였다.

아이만이 정한 그 공간으로 초대해 주도록 기다렸다가 잠깐 잠깐 열어 보일 때를 기다렸다. 잠시나마 실내 어딘가에 집중되어 손이 내려올 때면 잽싸게 ‘반가워’ 노래했다. 단어 하나라도 좋으니 잠깐의 틈을 매사 주시하며 기다렸다. 다시 귀를 막으며 내면의 문을 닫을 때면 옆에서 미소로 응시하며 함께 했다. 움직이면 움직이고 멈추면 멈추고 걸어가면 나도 나란히 함께 걷고. 아이가 곧장 알아채지 못해도 건네고 싶은 마음은 하나였다.

‘네가 걷는 그 모든 곳에 내가 함께 할게.’
‘혼자 있고 싶을지 모르지만 네 옆엔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그 중엔 나도 있을거야, 네가 준비될 때까지 언제든 여기서 기다릴게.’
‘넌 혼자가 아니고, 우린 함께야.’

아이가 아는 지 모르는 지 알 수 없으나 진심은 통하리라 믿는다. 당장에 듣지 않는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문을 열거라 믿는다. 언젠가 아이와 함께 박수만 치더라도 감격스러울 것 같다.


사진출처.pexels.

“쉿! 애들아, 저기 봐봐. 엘사에 나오는 땅의 정령 바위 거인들이 잠들어 있어. 우리가 이야기하는 소리에 바위 거인들이 잠에서 깰지도 몰라.”

한참을 조잘거리던 입과 행동이 사뭇 진지해지고 애들의 눈이 한껏 커진다. 엄마는 아이들의 동심과 대화했다는 자부심에 한껏 들뜬다. 하여 과하게 쉴새 없이 조잘조잘 ‘땅의 정령이 여기에 있네, 바위 거인들이 일어나면 어떨 것 같아? 와, 여기서 다들 잠을 자고 있나 봐, 날이 더워서 물 속에서 자고 있네, 코만 내어 놓고서 숨을 쉬는 것 좀 봐. 엄마가 한번 큰 목소리로 깨워 볼까.’ 했더랬다. 그러다 결국 남매가 한 마디 외친다. ‘엄마, 좀 조용히 해봐.’

후훗. 아이들이 놀란 것 좀 봐. 재밌어 했을라나. 진짜 정령들이 잠이 깰까봐 노심초사해서 그러나? 아이들이 보기엔 큰 바위들이 어떻게 보이려나 내심 으쓱했다. 헌데 이런, 남매의 반응이 상이하다.

둘째 아이. “엄마,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진짜로 바위 거인이 깨면 어떡해” (훗. 그럼 그렇지!!)
첫째 아이. “엄마,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그만 좀 해, 시끄러워.” (어머, 이럴수가!!)

세심히 살피는 모양새가 내 보기엔 둘 다 짐짓 놀랬던 게 분명하다. 헌데 반응들이 왜 이렇게 예상과 다르지? 아니라면 분명히 둘 다 놀랬으나 반응이 다른 거겠지? 둘째 아이는 아직 이런 상상의 대화가 가능한데 첫째 아이는 진지하긴 했지만 믿지 않는 눈치다. 설마, 이런. 벌써 이렇게 큰 건가?

마냥 어리기만 한 듯 한데 어느새 생각이 자라고 몸이 자란다. 아직 애기 같은데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점차 아이의 독립심을 응원하고 스스로 잘 자라고 있음을 부모로서 인정해야 할 때다. 품을 내어주고 시간을 내어주자던 다짐으로 영유아기를 함께 했다. 아이가 늘 엄마를 찾는 게 익숙했다. 아직은 작고 어리기만 한 아이 같은데 그 생각이 과거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은지 들여다 봐야 할 때이다.

여전히 엄마의 품에 파고들 때도 많지만 어쩌면 이제 친구의 자리가 점차 커질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인 것 같다. ‘아이가 성장하는 만큼 부모로서의 역할도 성장해야 하는 때’ 말이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아이가 해내는 것을 지지하고 실수를 보듬어주고 말이다. 학령기의 아이가 제 속도와 발맞추어 걷는다. 아이는 언제나처럼 잘 자란다. 이제는 현재를 직시하고 그에 따른 행동과 마음가짐을 할 수 있도록 나를 되돌아보는 지점이다. 아이처럼 엄마도 한 걸음 더 성숙해져야 할 때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

2021. 8. 22.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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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읽고 있는데 옆으로 다가온 딸이 문득 건넨 질문.

 

“엄마, 로봇이 다 일하게 되면 사람은 어떻게 일해?”

“오, 사랑아. 정말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해.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로봇이 할 수 없는 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말이야. 이미 우린 로봇청소기가 청소하고 식기세척기가 설거지를 해줘. 짱구가 알아서 음악을 틀어주고 핸드폰 하나로 전등을 켰다 끌 수도 있잖아. 어쩌면 앞으론 이것까지 모두 알아서 해 주는 로봇을 고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네가 살게 될 인공지능 세상에서는 우주까지 다녀오는 일도 타 지역 이동하는 것처럼 편리해질지도 몰라.

 

그러니 딸아.

네가 살게 될 인공지능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건, 네가 누구인지 잊지 않는 힘이 필요할지도 몰라, 인공지능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네가 인공지능을 다룰 수 있는 힘이 필요할거야.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고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일 수 있는 힘. 깨어있을 수 있도록 늘 책을 가까이 하고 네가 너답게 살 수 있는 힘 말이야. 너만이 할 수 있고, 네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우린 찾아야 할 거야. 당장에 다 알지 못하더라도 그건 우리가 앞으로 더 찾아보자.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게 말이야.

 

괜찮을거야. 분명한 건 더 편리하고 좋을 수도 있겠지. 너를 잘 안다는 건 더욱 자유롭고 너다울 수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