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피아노를 배운다. 여섯 살 즈음에는 재미로만 뚱땅거리다 여덟 살이 되니 제법 진지하다. 멜로디 연주가 좋은 지 생각 외로 열심히 한다. 아는 멜로디가 나오면 연주하면서 흥얼거리기까지. 새삼 한 뼘 자란 아이를 느낀다.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반복 연습도 하고 밥 먹다 갑자기 피아노 앞에 앉아 배운 것을 연주해 보기도 한다. 노는 것만큼이나 피아노 치는 것이 재미있다니 지금이야말로 적기구나 싶다.
그리고. 아이 덕분에 레슨을 한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까지 레슨을 했으니 팔 년 만인가. 새삼스럽다. 언제나 다시 레슨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이 덕분에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감격스럽다. 더군다나 내 아이와 레슨을 하게 될 줄이야.
코로나19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생각과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니 말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내 아이에게 레슨은 못 하지 싶었다. 예정대로 학교를 다녔다면 아이는 피아노 학원이나 방문 레슨을 했을 거다. 무분별한 사교육은 지양하지만 삶에 악기 하나쯤은 연주했으면 하기에. 전부터 아이는 바이올린을 원했는데 그러자면 피아노 연주와 악보는 필수였다. 해서 문득 시작했다. 워밍업으로 가볍게 시작해봤는데 꽤나 진지한 아이를 보니 레슨까지 가벼울 수는 없었다.
십 년 가까이 되어서 케케묵은 자료로 남을 줄 알았던 교재와 테크닉 노트를 더듬어 봤다. 요즘 새로운 교재들도 훑어보고. 그러자니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예전에 레슨으로 만난 아이들은 어느새 15세 ~ 20대 청년이 되어 있겠지.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만으로도 젊어진 것만 같다. 그때의 내가 소환되어 선다. 피부도 그때보다 탄력을 잃고 까칠해졌지만 레스너로는 여전하다.
아이 덕분에 하루 하루 성장하는 매일을 산다. 레스너로서 나를 재회하는 시간이 활력을 가져다준다. 가족이기에 최대한 많이 배려하고 기다리는 레슨이 되도록 인내해야 하지만 그것조차도 우리만의 추억이 된다니 뿌듯하다. 색다른 경험이다.
아침 등굣길. 아이 원피스에 눈길이 갔다. 몇 년째 작아지지 않는 원피스가 야속했다. 작년 옷 정리 하면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남겨두자 했던 옷이 여태껏 맞다. 서운함과 불안의 눈빛으로 원피스를 바라보다 흠칫 놀라 눈길을 거두었다. 아이에게 들킬세라 미안해서와 조급하지 말자 했던 다짐이 떠올라서다.
첫째 아이는 체구가 작다. 올해 여덟살인데 평균치 6세 정도만 할까. 몸무게는 아직도 19.5 정도(6세 평균)이고 키는 다섯 살 남동생과 오 센티 남짓 겨우 차이가 날까 말까다. 남매가 예뻐 말을 붙이시는 어르신들이 연년생이냐, 묻기도 하고 딸 하나 아들 하나 이백 점 쌍둥이네 하시는 분도 있다. 한 번은 영유아 검진 뒤 의사의 추천으로 대학병원을 찾은 적도 있다. 성장 호르몬 검사를 받기 위해서다. 결과는 이상무. 호르몬 자체는 충분한데 보다 정확한 원인을 알려면 아이를 더 극한 스트레스 상황으로 노출시켜야 한다 길래 관두었다. 성장 호르몬에 문제 없다는데 아이를 괴롭게 하면서까지 성장에 목매고 싶지 않았다. 아무 이상 없으면 기다리는 수밖에.
그래도 엄마 마음으로 조급증은 조금 생겼다. 음식에 집중한다거나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안달하거나. 도통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밥 먹는 양도 작다. 우유나 고기에 목매지 않았다가도 산책하다 노부부가 ‘우리 손녀가 여섯 살인데 더 큰 것 같다.’ 바람처럼 지나는 말에 압박감으로 고기를 먹이려는 나를 본다. 아직 어릴 때는 언젠가는 크겠지 여유를 부리다가도 주변에서 한마디씩 읊조리면 다시금 경기 일으키듯 경각심을 세우는 거다.
사실 더 세밀히 들어가보면 내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엄마가 관리를 안 해줬나, 엄마가 잘 안 먹인 것 아닌가? 하고 주변에서 『판단』과 『평가』할 것만 같은 내 문제. 엄마 역할에 점수제가 있었다면 아마 나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안달 나 아이는 안중에도 없었을 거다. 예쁜 아이, 재능을 보이는 아이, 조기 교육에서부터 유행하는 육아관까지. 바람 같은 말에 쉬이 흔들리는 엄마 팔랑 귀가 문제다. 아이의 성장에 있어서 팔랑 귀 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다. 팔랑 귀를 부추기는 다양한 매체에서부터 주변 엄마들의 ‘카더라’까지.
더해서 『평균치』라는 것이 참으로 요상타. 평균이라는 범주 안에 들지 않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늦게 자라는 아이도 있고 빨리 자라는 아이도 있는데 각자의 개별성보다는 평균 안에 드느냐 들지 못하느냐가 잣대가 되어서는 순위를 메기는 꼴이니 말이다. 아이를 믿고 기다리자 하면서도 평균치를 밑돈다 하면 조급해진다. 엄마가 뭘 잘못했나 죄책감도 들고.
외부적인 잣대와 아이만의 성장을 분리하고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프리카 속담에서인가 『잡초를 잡아당긴다고 해서 빨리 자라지 않는다.』 라는 문장처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지 말고 나와 내 아이만 보고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 내 아이의 상태를 인정하고 아이 본연의 개별성을 이해해야 한다. 내 아이만의 성장속도를 존중하고 지켜주는 것. 그거면 되지 않을까.
온라인 수업을 하는 순간부터 계획했다. 매일같이 시청을 하는데 건강을 챙길 방법을 모색했다. 더군다나 놀이밥도 엄마인 내가 챙겨야 한다는 비장의 각오를 했다. 사람 없는 곳만 찾아 다니기!!!!! 되도록 매일 놀이밥챙기기!!!!!!
코로나로 인해 사람 많은 곳은 불안하니 마스크를 쓰고 난 후부터는 자전거 도로 산책을 매일 나갔다. 그리고 연이어 공원 투어하기.
안자산 공원미루공원별천지 유아공원별천지 어린이 공원민속박물관 정원좌구산 유아 산책코스모래놀이모래놀이터징검다리 건너다 물놀이
지역이 아이들 위한 공원과 놀이터를 잘 조성해 주어서 매일같이 다른 곳을 선택해 갈 수 있다. 덕분에 놀이밥 먹이는 재미도 쏠쏠하고. 아이들과 논다는 의미도 다시 새겨볼 수 있다.
비싼 놀이동산만 찾을 것이 아니라 가까운 놀이터에서 놀때 마음을 다해 함께 노는 것. 놀이도 결국 함께 하는 시간의 질이 중요하다. 하루 두 세 시간씩 매일같이 놀이밥을 먹는 아이들은 평생 마음이 건강할 수 있는 자양분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엄마인 내가 함께 놀이한다면 더없이 좋은 파트너가 되고.
집에서 차로 15분 정도면 오를 수 있는 산이 있다는 조건도 좋다.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서 남매와 두런두런 대화나누며 오르내리는 과정은 사랑을 쌓는 과정이다. 높은 곳에 오르지 않아도 좋다. 산에서 느끼는 것들을 만끽하는게 포인트다. 건강을 챙길 수 있는 건 덤이다.
코로나가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다. 아이에게 온라인 수업으로 계속하자고 설득했으나 학교를 꼭 가보고 싶단다.
설렘 반 기대반으로 등교길에 오른 딸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입학식이 연거푸 연기되는 상황이 얼마나 서운했을까. 쑥쓰러움 많은 딸아이가 연신 미소를 띄니 그간 학교생활이 그립긴 했나보다.
첫 등교하는 친구는 우리 아이 포함해 총 여섯명. 돌봄 교실 다니고 있던 친구 네다섯명. 열 명 남짓 친구들과 처음 만났다. 안내해 주는 선생님 따라 간격을 두고 한 줄로 걸어간다. 책가방 메고 실내화 주머니 들고 작은 체구의 아이가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괜시리 목이 메였다.
처음 초등학교를 보내는 기분은 이렇구나. 대견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고,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내온 7년 세월까지. 내 서른 초반부터 줄곧 함께 해 온 아이다. 키울때 어려움과 초보엄마라 부족했던 두려움까지. 지나온 무수한 시간이 나에게는 졸업, 아이에게는 입학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순간임을 배운다.
첫 등교 축하 이벤트 선물
유치원 졸업식은 간소화되고 학교 입학식도 생략되 안타까운 마당에 첫 등교까지 가벼울 수 없었다. 아이가 학교로 들어가고 난 후 이벤트 준비를 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보라색 수국과 이름을 보여주는 하트모양 케이크를 사는 데 괜히 또 울컥. 마음이 울렁울렁한다. 왜 이렇게 아이에게 미안한 것, 상처준 것, 못 해준것만 기억나는지... 앞으로 만들어가는 날 하루하루가 마지막인 듯 아이와 많은 추억을 만들어보리라 다짐해 본다.
12시 30분 하교길 마중에 아이가 보인다. 얼른 달려가 엄마 없어도 괜찮았냐 물으니 쑥쓰럽긴 했는데 재밌었단다. 이대로 집에 가기는 아쉬우니 운동장에서 놀고 싶다고도 하고. 처음 가 본 학교가 그리 좋았는지 들뜬 마음이 쉬 가라앉지 않는다. 아이 미소에 덩달아 행복해진다.